[직설] '진짜' 디스토피아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2022. 10. 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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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빽빽이 들어찬 높은 건물 사이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도시의 모습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내게 그런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블레이드 러너>는 이미 망가져 버린 지구의 전경을 비춘다. 망가진 기후로 인해 해가 들지 않는 도시에는 언제나 산성비가 내린다. 빗물과 도시 오물이 뒤섞여 흐르는 질척한 땅바닥. 도시 하층민은 그런 질척한 땅 위에서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산성비를 맞으며 살아간다.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이 글을 써내려가는 지금, 창밖에도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맑다가도 갑자기 내리는 비 때문에 신발과 바지가 젖은 채 들어온 게 여러 번, 통상의 날씨를 피해 비를 뿌리는 범인은 ‘기후위기’다. 1980년대의 상상력이 그린 망가진 기후 속 하층민이 질척한 땅바닥 위의 부랑자라면, 2022년에 마주하는 도시 빈가는 가장 높거나 낮은 곳에 있다. 차가 닿을 수도 없이 가파른 오르막 위나 햇빛도 잘 닿지 않는 반지하. 속수무책으로 바뀌는 기후에 더 연약할 수밖에 없는 곳들이다. 재난은 더 취약한 곳에 더 큰 상처를 남기기에,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불평등에 대비해야 한다.

평균 기대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고령화 시대. 아직 나는 60년도 더 살아야 하는데, 여름은 견딜 수 없이 더워지기만 하고 해수면은 높아진다. 인간이 손쓸 수 없이 일어나는 재해는 인류를 넘어 동물의 생명, 생태계까지 위협한다. 식탁도 위험하다. 언제까지 배부르게 지금의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다. 플라스틱 쓰레기는 산처럼 쌓여 이미 바다 한구석에 섬을 이룬 지 오래다. 속수무책으로 쓸려 내려가는 가난한 삶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생활방식을 유지한다면 이 지구에 나와 내 친구의 삶은 더는 없을지 모른다. 이처럼 기후는 더 이상 환경에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기후정의’다.

얼마 전 진행된 9·24기후정의행진에 등장한 문구는 여러 가지였다. 일하다 죽지 않고, 내 삶과 일터를 잃을 불안에 떨지 않고, 소수자인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사회. 이 3만5000 시민의 요구는 제도에 닿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오히려 기업이 ‘그린워싱’한 녹색경영과 정부의 민간화 추진 사업에서 기후위기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여전히 탈탄소 정책은 요원하며, 국민연금 기금은 탄소기업에 투자해 운용된다. 불평등 해결을 위한 복지 예산은 감축됐고, 의료서비스도 민간으로 돌아가고 있다.

결국 싸워야 할 것은 이 현실을 부정하는 정치다. <블레이드 러너>의 비가 그치지 않는 도시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타일리시’한 영화적 배경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 밖의 현실이다. 영화의 기후위기 대안은 지구 외 이민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가 벗어날 곳은 없다. 살아남기 위해선 현실의 잘못된 생활 방식을 바꾸기 위해 부지런히 싸워야 한다.

행진 당일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미국대사관 앞 차로에 누웠다. 광화문 한복판, 그 넓은 차로에 누워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10초가 넘는 시간 동안 바라보았다. 이 아름다운 하늘을 잃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과감한 정책으로 실현할 때이다.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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