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유서' 입수한 탈북 박사..왜 文정부서 간첩몰이 당했나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장세정 입력 2022. 10. 4. 01:00 수정 2022. 10. 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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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 원유 밀거래' 등 북한이 싫어할 정보 폭로해온 이윤걸 대표
"'김정은의 비핵화는 거짓말' 외치다 주사파 정권에 밉보여 구속"
대북공작관 등 37년 첩보장교 활약한 정규필 전 정보사 대령
"문 정권 국정원·기무사·정보사까지 대북공작 시스템 초토화"
이 대표는 대법원서 무죄, 정 전 대령은 무혐의 후 별건기소
"탈북자와 대북첩보조직 파괴 노린 주사파 시나리오" 의심
문재인 정부는 해명하고, 윤석열 정부는 수사해 진상 밝혀야
장세정 논설위원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남·남 갈등'도 심각한 한반도에서 북한 관련 정보를 캐거나 대북 공작 일선에 투입되는 일은 생명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 북한의 온갖 협박에도 꿋꿋하게 버텼으나 문재인 정부 시절 간첩으로 내몰려 엄청난 고초를 겪은 두 사람이 있다. 탈북 지식인 이윤걸(54)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와 베테랑 대북공작관 출신 정규필(58) 예비역 육군 대령(호림안보협의회 회장)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문 정권 시절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황당한 '간첩 몰이'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최근 두 사람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들어봤다.

2018년 9월 20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천지에서 손을 잡고 웃고 있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이 있었지만, 김 위원장은 최근 '핵 선제 사용 법제화'를 발표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김일성 장수 연구하다 2005년 탈북
이 대표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조부모 형제가 일찍이 월남해 북한에 남은 가족은 최하층민으로 살았다. 기적적으로 북한의 3대 명문 중 하나인 평양이과대학을 졸업하고 김일성 주석을 위한 '만수무강연구소' 소속인 청암산연구소(호위사령부 관할)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2005년 "잘못된 북한 체제를 바꾸겠다"며 탈북했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가 2012년 초 입수한 '김정일 유언'을 담은 책을 든 모습. 장세정 기자

충남대에서 생명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 대표는 통일부·국가정보원·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 등 주요 대북 기관들과 협력하며 알토란같은 북한 내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 보고서를 제공해왔다. 그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계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2011년 12월) 불과 넉 달 후인 2012년 4월 '김정일 유서'를 입수해 공개한 때였다. 그해 11월 『김정일의 유서와 김정은의 미래』를 출간하면서 2013년 12월에 터진 장성택(김정은의 고모부) 실각을 예견해 대북 정보 입수 능력을 입증했다. 특히 이 대표가 북한 내부 정보를 근거로 "핵·미사일·생화학무기는 '김씨 가문의 보물'이어서 정권이 망하기 전에는 내놓을 리가 없다"고 역설하자 우파는 환호했지만, 좌파는 '탈북자=배신자' 프레임을 걸어 공격했다.
아니나 다를까.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바로 다음 날 오전 8시 검찰수사관들이 압수수색영장을 들고 집과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6월 21일 이 대표는 유엔 대북 제재를 어기고 북한과 중국이 단둥 항구에서 원유를 밀거래하는 북한 청류1호 사진을 입수해 폭로했고, 공교롭게도 7월 16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국군정보사령부 전·현직 간부의 군사기밀 빼돌리기를 수사하던 국정원과 검찰이 이 대표를 엮으면서 졸지에 대북 정보를 일본에 넘긴 파렴치범으로 몰렸다. 이 대표는 "대한민국을 위해 일했는데 분노가 치밀었다. 목숨을 던져 항거할 생각도 했다"며 당시 심경을 회고했다.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 2019년 1월 31일 1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김정은 위원장이 2012년 2월 22일 인민보안부 산하 '경기용 총탄 공장'을 현지지도하던 중 턱을 치켜 세운 고모부 장성택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장성택은 이듬해 12월 총살당했다. 사진 이윤걸 독점 입수

풀려난 이 대표는 치밀한 반박 자료를 찾아내 그해 7월 26일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심 재판부는 "일본에 넘겼다는 자료는 이 대표가 평소에 취급했던 북한 정보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검찰이 상고했지만, 그해 10월 31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이 대표에게 왜 이런 황당한 일이 생겼을까. "북한 내부 기밀을 계속 빼 오니 북측이 손봐주라고 지목한 것 같다. 문 정권이 2018년 남북 대화와 북미 대화를 추진하던 무렵 내가 '김정일 유서'와 김정일이 직접 쓴 '회고록' 등 북한 정보를 근거로 김정은에겐 비핵화 의지가 없어서 핵 문제는 절대 해결 안 된다고 계속 주장했다. 주사파 운동권 출신들이 주도한 문 정권에 단단히 밉보였다."
그는 "누가 무리한 구속을 주도했는지 짐작하고 있다. 자유와 통일을 위해 올바른 일을 해온 나를 괴롭힌 사람들이 범법자이고 죄인이다. 대낮에 대한민국 헌법을 유린한 자들이 벌 받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대표는 "김정은이 최근 핵 선제 사용 조건을 법제화했다. 문 정권은 북한의 핵·미사일 강화에 시간을 벌어줬다"고 비판했다. 이어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통일되면 주사파는 자신들의 결탁과 내통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한다"면서 "문 정권의 잘못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26년간 대북공작관으로 맹활약한 정규필 예비역 대령이 평양 시내 전경 그림 앞에 서 있다. 장세정 기자

북·중 국경 흑색요원, 굶으며 1주일 버텨
'최고의 대북 첩보 장교'로 손꼽혔던 정규필 전 대령은 경북 포항이 고향이다. 육사 42기로 임관한 뒤 2019년 대령으로 전역할 때까지 37년간 현역으로 복무했다. 정보 병과 출신으로 1991년 대위 시절 인간정보(HUMINT)를 담당하는 북파공작부대(HID) 팀장을 맡은 인연으로 2017년까지 26년간 국방부와 합참 산하 정보본부,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대북공작관으로 국내외 험지에서 맹활약했다.
처자식을 떠나 혈혈단신으로 북·중·러 국경지대에서 '흑색 공작'을 진행하면서 풍찬노숙을 마다치 않았고, 중국에서만 14년간 주중대사관 무관 등으로도 활동했다. 특히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대북 핫라인 구축을 위해 중국에 급파됐다.
탄핵으로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중국에서 귀국한 그는 정년을 1년 6개월 가량 앞둔 2019년 3월 말 전역했다. "고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자연인이 됐으니 자유를 맘껏 누리겠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5월 14일 국정원 요원 21명이 28평 아파트에 몰려와 22시간 동안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압수수색을 강행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유출) 혐의를 받는 간첩으로 몰렸다. 현역 시절 안중근 의사의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신념으로 받들며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과 명예심으로 살아왔던 그의 인생이 180도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2009년 8월 21일 당시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을 위해 서울을 방문한 김양건 북한 통전부장을 만나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양주로 건배하는 모습. 정규필 전 대령은 남북 당국의 막후에서 비공개 역할을 수행했다. 사진 대북정보요원 측 제공

그는 국정원 요원들에게 "국가와 민족 앞에 스스로 켕기는 것이 있으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할복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당당했다.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 것 같아 컴퓨터 비밀번호까지 친절하게 알려줬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고 시간이 가면서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아무도 몰라주는데 생사를 넘나들며 돈키호테처럼 살았다는 억울함, 믿었던 국가가 아무 잘못도 없는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는 분노, 북·중 국경지대에서 흑색요원으로 활동하면서 단돈 10위안(약 2000원)으로 굶주리며 1주일을 버텼던 시절이 생각나며 서글픔이 밀려오자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결국 119에 실려 갔다."
국정원과 서울중앙지검에서 수차례 소환 조사를 받았지만 2020년 2월 18일 기밀누설죄 무혐의 통보를 받았다. 국정원이 제기한 기밀이라는 것은 정 전 대령이 현역 시절 기무부대에 자진해 보고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무혐의를 통보하면서 검찰은 "군사기밀보호법상 비인가자가 기밀을 탐지·수집·점유하고 있다"며 압수수색영장에 없던 별건으로 기소했다. 청천벽력이었다. 그는 "전역하기 전에 컴퓨터에 소장된 자료를 모두 삭제했는데 국정원이 포렌식으로 복구해 검찰에 무리하게 '기소 청탁'을 했다"며 반발했다.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찾아간 정규필 예비역 대령. 그는 소위 임관 때부터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의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신념으로 삼아 생사를 넘나들며 대북공작 활동을 성실히 수행해왔다고 자부했다. 무공 훈장을 여러개 받아도 될 정도로 국가를 위해 수많은 공을 세웠지만 '첩보 장교'의 비밀 업무 특성상 공식 기록에 남길 수 없어 그의 가슴엔 유일하게 '보국훈장 삼일장'만 달려 있다. 장세정 기자

법정에서 "2013년에 생성한 문건은 1년 후에 이미 기밀 해제된 데다 내가 작성한 문건을 내가 수집·탐지했다는 별건 기소는 군사기밀보호법 성격상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지만, 지난 7월 서울중앙지법은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곧바로 항소한 그는 "37년간 군인으로 일하면서 앞에서 날아오는 적의 총알은 피할 수 있었지만, 뒤에서 내리찍는 아군의 도끼날은 피할 수 없었다"며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문 정부 간첩 조작 시나리오' 밝혀야
그는 얼마 전 대통령실에 "국정원의 간첩조작사건에 대해 조사해 달라"며 청원서를 제출했다. 청원서에서 "37년간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군인을 간첩으로 모는 바람에 내가 근무한 대북공작부대·정보사·국방정보본부는 물론 주중대사관 무관부 등 대북 정보를 다루는 휴민트 관련 조직까지 별건 조사를 구실로 초토화했다"며 "문 정권 시절 국정원이 무슨 짓을 했는지 밝히고 군 정보기관과 조직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군부 독재정권 시절에는 간첩 조작 사건이 많았지만 '사람이 먼저'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문 정부 시절에 벌어진 간첩사건은 매우 낯설다. 이 대표와 정 전 대령은 "문 정권 시절 국정원의 간첩 몰이는 북한에 불리한 활동을 해온 탈북자와 대북첩보 조직을 파괴하기 위해 주사파 세력이 꾸민 모종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였다"고 의혹을 제기한다.

유엔의 대북 제재가 가동중이던 2018년 5월 16일 중국 단둥의 한 항구에서 북한 국적 청류1호가 밀거래한 원유를 싣는 장면.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는 이 사진을 입수해 그해 6월 21일 국내 언론에 폭로했다. 북한을 불편하게 만든 이 대표는 7월 16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사진 이윤걸

정 전 대령은 "문 정권 들어 좌파들이 2017년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어 국정원을 장악하고, 2018년엔 기무사를 해체하고, 2019년엔 정보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대북 정보 시스템이 무너지니 2019년 11월 탈북 청년 어민 2명의 비밀 강제 북송 사건이나 2020년 9월 해수부 공무원 이대준씨 서해 피살 사건의 진상이 당시에 덮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정규필 대령 간첩 조작 의혹'은 지난 9월 20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도 거론됐다. 한덕수 총리는 "필요할 경우 감사를 진행할 수 있다"며 "결국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답변했다. 문 정부가 해명하고 윤석열 정부가 밝혀야 할 의혹이 추가된 셈이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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