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오캄의 면도날
"실체를 필요 이상으로 복잡화하여서는 아니 된다"라는 명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오캄의 면도날'이라 일컬어진다. 적은 가정(假定)으로도 충분하다면 불필요하게 많은 가정은 사유의 면도날로 다 잘라내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단순성 내지 간결함의 원리는 오늘날 미니멀리즘의 사조나 이른바 단색화의 미학으로도 우리 주위에 알게 모르게 밀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최근 역사를 되돌아보건대, 지난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 반발하는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국민의 각종 민원이나 불만사항을 다 해결해주겠다며 대민 창구를 활짝 열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상당 부분은 애초부터 권력의 의지로써 해결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그 처리가 결국 검찰에 떠넘겨져 엄청난 사법적 부담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대폭 늘렸음에도 검사 1인당 월 처리건수가 500건을 넘나드는 살인적 업무환경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민원의 실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복잡다기하여 몸의 털을 제거하듯이 깔끔하게 다듬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부정적 여파로 지금까지도 '민사사건의 형사화' 현상이 불식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심각하다고 할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최근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검찰과 법원의 독립과 중립성을 근저에서 뒤흔들고 있다. 정치적 분란을 사법부로 가져가는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양당 구도가 고착화하고 법조인들의 정치권 진입이 늘어나면서 온갖 고소·고발과 가처분의 싸움터로 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정의를 수단화하고 거래하여 법적 정의를 무력화시키는 일들이 서슴없이 도모되고 있는 징후이다.
얼굴의 피부를 상하게 하지 않고 수염을 깔끔히 깎아내려면 면도날이 예리하면 예리할수록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든 날카로운 칼날에 자상을 입을 위험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불의의 치명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지난 정권 말 쫓기듯이 통과시킨 소위 '검수완박' 입법의 경우와 같이 법이면 다 된다는 도그마로 칼을 휘두르거나, 타협과 조정의 정도를 저버리고 사법을 마치 용병처럼 부리려고 한다면 스스로의 존재 이유도 부정될 따름이다.
법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일지언정 최선의 수단일 수는 없다. 대철학자 칸트가 면도날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남긴 말을 오늘의 우리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실체의 다양성은 섣불리 깎아내려서는 아니 된다."
[김규헌 큐렉스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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