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오징어게임'을 하지 않는 방법
패닉바잉 현상 이젠 패닉셀링
'투자=성공' 게임판 환상 그만
소박한 내 집 있으매 감사한 마음
회식이 있었다. 부동산이 주제는 아니었다. 이슈는 ‘이사’였는데, 이사 이야기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부동산 이야기로 쏠렸다. 오래지 않아 구멍이 생겼다. 나였다. 그들이 이사한 고급 아파트 이름, 나로서는 처음 들어본 것이었다. 같은 도시에 살아도 마치 다른 공간에 사는 것처럼, 다른 시간대를 사는 것처럼 서로 겉돌았다. 나의 무지에 대해 약간의 놀림 섞인 감탄도 이어졌다.
아니다, 이 생각조차 안일하다. 어떤 이들은 부동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선택권조차 갖지 못한다. 당장 주거 문제 자체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나의 안정감과 만족감이 적절한 소외와 냉소적 아이러니에서 온 것이라 해도, 이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집은 단지 거주지일 뿐이라고 역설하는 것은 도덕적 허영이거나 권력을 가진 자의 이데올로기다. 서민 고통 운운하며 양극화와 불평등을 완전히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극단적 이념 또한 이미지 메이킹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마치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해 유기농 제품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다국적기업처럼, 이미지를 구매하는 소비자 같은 지지자를 끌어모은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 발표는 분명 예측 효과가 있다. 최근 부동산 조정대상지역 일부를 해제한다는 정책이 나왔다. 이 정책이 떨어지는 집값을 잡고 거래를 활성화시킬까. 아니, 오히려 앞으로 집값이 더 떨어질 거라는 사실을 예고한다. 투기지역 지정이 앞으로 더 집값이 오른다는 시그널인 것처럼.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는 오직 그 잘못된 것들의 지속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들, 부조리한 것들은 정치의 자원이다. 양극화 해소 또한 영영 불가능하기 때문에 늘 정치권의 이슈가 되고 그 이슈에 권력이 모인다.
부에 대한 관심이 경제에 대한 관심과 직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부에 대한 집착이 경제에 대한 문맹을 만든다. 빚투와 영끌이 그 결과다. 부동산·주식 유튜버는 이 시대 구루(Guru)다. 이들은 예측은 할 수 없다는 단서를 달고 예언한다. 구독자는 마치 신도들처럼 열광하며 불안해한다. 실패를 자책하며 ‘더 공부’하겠다고 다짐한다.
전 세계가 ‘오징어 게임’이다. 얼마 전, 패닉바잉 하던 사람들이 패닉셀링에 몰입한다. 주가 폭락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 결정적 시기라며 투자를 종용하는 목소리도 다급하다. 불안과 공포가 마케팅에 악용된다. 마케팅만이 아니다. 정치도 이 불안과 공포를 권력의 정당성에 이용한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누가 이득을 보던가. 게임에서 이긴 ‘기훈’이 아니었다. 그도 희생자일 뿐이었다. 오징어 게임을 즐긴 자는 그 게임을 한 자가 아니라 본 자들이었다. 이 세상도 그렇게 작동한다. 누군가는 게임을 하고, 그 게임에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희생양이 된다. 권력자와 자본가는 그 게임을 이용해 더 강한 권력과 더 거대한 자산을 모은다.
남들이 모두 부동산하고 주식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가장 피해가 덜했다. 일시적 성공은 실패의 전조처럼 돼 버렸다. 정보에 민감하고, 정부 발표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많은 사람이 그 정보 때문에 길이 막혔다. 자발적 무지는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선택하는 지혜가 돼 버렸다.
무정부주의는 아니다.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면 정부와 싸울 수밖에 없다. 중심세력에 대한 직접적 저항은 그 중심세력과 동일한 방식의 투쟁을 하게 만든다. 적과 싸우면서 적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에 무조건 저항하다가는 죽을 수 있다. 그 게임판에서 맹목적으로 경쟁하다가도 죽을 수 있다. 오징어게임판에서는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 안 된다. 패배에 대해 자위해서도 안 된다. 이 게임판이 만드는 환상에 걸려들지 않아야 한다. 노력하면 성공할 것 같은 환상이 모두를 희생시킨다.
내게도 부동산에 대한 욕망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안다. 알기 때문에 이 이데올로기와 삶을 조율한다.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만들어낼 기회비용을 계산한다. 자본주의 게임판을 직시하면서 게임 룰의 빈틈을 찾는다. 빈틈은 타인과 함께하는 삶 속에 있다.
3년 만의 회식은 불편했다. 이 불편함이 가능해진 것에 감사했다. ‘불편하다’며 어리광 부리듯 너스레 떠는 것도 재밌었다. 마치 낯선 여행지에서 이방인을 만난 듯했다. 우리는 다소 아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식 종결이 아쉬운 것도 낯선 경험이었다.
한적한 길을 지나, 이렇다 할 인프라가 없는 조용한 아파트에 들어섰다. 내 밥벌이 일터와 적당히 가깝고, 삶의 패턴에 적절히 어울리는 곳. 변심하지 않는, 어느새 친구같이 돼 버려 약간은 서운하기도 한, 오랜 연인 같은 나의 집이었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사슴피 목욕, 얼음물 입수… ‘71세’ 푸틴, 영생 꿈꾼다
- “못생겼다” 말 듣고 차인 여성…한국서 180도 변신 후 인생도 180도 바뀌어
- 20대 여성들 대구서 1년반 동안 감금 성매매 당해…주범은 20대 여성
- 일본 여친 만드는 방법은 ‘데이트 앱’?…日신혼부부 앱으로 만나 결혼
- 16살 어린女와 바람난 남편…분노한 아내, 개인정보 공개했다가 ‘명예훼손’ 고소당해
- 아내 몰래 유흥업소 다니던 남편…결국 아내와 태어난 아기까지 성병 걸려
- “용변 급해 내렸는데 고속버스가 떠났어요”…수상쩍은 10대男 ‘블루투스’에 덜미
- “발 냄새 맡자” 전자발찌 찬 40대 여성 성폭행 하려다 또 징역형
- 누가 잘못?…범죄로 교도소 간 아내 vs 위로한 女동료와 사랑에 빠진 남편
- 사랑 나눈 후 바로 이불 빨래…여친 결벽증 때문에 고민이라는 남성의 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