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 닮은 형상들.. 산업화된 세상의 미적 감수성
한국 기하추상의 선구자.. 작고 32주기
'핵' 연작 등 주요 작품 30여 점 선보여
기차 여행 빠르게 스치는 잔상의 감동
아폴로 발사 이후 새 공간 의식이 자극
파이프 그림 시작.. 탈회화적 추상 제시
"형상 이면의 선과 색채 앙상블 읽어야"
“기차여행 중이었다. 눈을 감고 잠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얼핏 무언가 망막 속을 스쳐 가는 게 있었다. 나는 퍼뜩 눈을 떴다. 집에 돌아온 즉시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마음에 남은 이미지를 조작한 결과 오늘의 파이프적인 그림을 완성했다.”
이승조는 194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뒤 해방공간 한반도에서 가족과 함께 남하했다. 중·고교 시절 미술반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1960년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청년 이승조는 전위그룹을 결성하며 한국 모더니즘 미술을 추동했다. 1962년 권영우, 서승원 등과 함께 기존 미술 제도와 기득권에 맞서 ‘오리진(origin)’을 결성했고, ‘아방가르드 그룹(AG)’ 창립에도 함께했다.
오리진, 즉 근원을 좇으며 자기만의 조형언어를 만들어가던 그는 1967년 ‘핵(核)’ 연작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최초의 ‘핵’ 발표 넉 달 후 파이프 형상이 등장하게 된다. ‘핵’ 연작의 열 번째 작품이기도 했다. 기차 안에서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풍경과 사물의 잔상을 감은 눈 속에서 본 뒤 그려낸 것이지만, 파이프를 닮아 일명 ‘파이프 그림’으로도 불리게 됐다. 폐허가 된 땅 위에서 재건 중이던 한국 사회, 국제적으로는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던 1960∼1970년대를 배경으로, 그의 그림은 급속한 기술발전에 따라 급변하던 미적 감수성을 연구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국제갤러리 측은 기계미학 이론가 이영준의 말을 인용해 “급격히 산업화되고 현대화된 세상의 새로운 감수성에 대한 반응”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새로운 기계문명이 가져온 지각방식의 변화가 평면이라는 캔버스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며, 기차여행 언급에서 보듯 이승조는 현대미술의 발전과 기계미학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했다.
치열한 고민을 동반해 그 땅에서 태어나고 호흡한 그림만이 끊임없이 의미를 재창출하고, 그런 작가들이 재발견된다. 자명한 사실을 가짜뉴스로 낙인찍거나, 우기면 그만이라는 듯 악다구니 쓰는 것이 세상과 권력의 작동원리가 된 지금, 자명함을 엄격하게 드러내는 회화가 다시 동시대 한국민과 호흡하는 듯하다. 그의 색띠는 급격한 퇴행 속에서도 전진을 꿈꾸게 하고, 가려지지 않는 핵심, 현혹에 맞서는 단단한 쇠기둥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넘어, 미래에서 온 선구자의 언어처럼 해독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아직 알아내지 못한 우주적 질서로 나아가도록 후세를 안내하는 듯하다. 10월 30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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