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노무현·김정일이 벼린 평화번영의 꿈

이제훈 입력 2022. 10. 3. 18:05 수정 2022. 10. 3.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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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의 1991~2021][이제훈의 1991~2021] _38

노무현 대통령은 즉석연설을 했다. “우리는 개성공단을 ‘개혁과 개방의 표본’이라고 많이 얘기했는데, 북측의 입장에서 볼 때 역지사지하지 않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개성공단의 성과를 얘기할 때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는 용의주도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귀에 들어가라고 일부러 한 말이다.

2007년 10월3일 오후 평양 백화원영빈관에서 노무현 대통령(맨 왼쪽)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 끝)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구상 등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정상선언)에 담을 내용을 조율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북한의 1차 핵실험(2006년 10월9일)을 불러온 ‘방코델타아시아(BDA·비디에이) 사태’가 해소(2007년 6월25일)되고 6자회담이 다시 구체적 성과를 내자, 남과 북은 바로 2차 정상회담에 합의했다. 애초 2005년 평양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남북공동행사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2005년 가을 정상회담’을 제안해 구체적 협의를 하다 ‘비디에이 제재’를 둘러싼 북·미 갈등 탓에 미뤄둔 터였다.

“8월2일부터 3일까지 이틀 동안 국가정보원장이 비공개로 방북해달라”는 김양건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장 명의의 전화통지문이 2007년 7월29일 남쪽에 왔다. 김만복 국정원장이 비공개 접촉을 제안하는 편지를 서울에서 열린 21차 남북장관급회담 때 북쪽 대표단에 건넨 지 두달 만이었다. 8월2일 평양 백화원영빈관에서 김만복을 만난 김양건은 대뜸 “‘북남정상회담이 그렇게 필요합네까?’라고 운을 뗐다”고, 김만복은 2차 남북정상회담의 경과를 기록한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에서 밝혔다. 김양건은 그러곤 “개최 시기는 가능한 한 빠를수록 좋으므로 준비기간을 고려해 8월 하순경으로 하고 장소는 평양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김만복은 8월4일 군사분계선(MDL)을 다시 넘어 노무현 대통령의 ‘8월 하순 평양 정상회담’ 수락 의사를 김양건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한테 전했다. 남과 북은 8월5일 합의한 “8월28~30일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 방문” 계획을 8월8일 오전 10시에 동시 발표했다.

그런데 북은 8월8일 “예상치 않았던 심각한 큰물 피해로 인해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9월 말로 연기할 것을 제의한다”는 전통문을 보내왔다. 사망·실종 600여명, 주택 24만채 파손, 이재민 100만명을 초래한 큰물 피해 탓이다. 남쪽은 추석 연휴(9월22~26일)와 노 대통령의 국외순방 일정(9월25~28일)을 고려해 10월2~4일에 하자고 수정 제안했고, 북은 즉시 수용했다.

2차 정상회담은 노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추진·성사돼 당시 대선을 앞둔 한국 사회에서 많은 논란을 낳았다. 심지어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던 송민순은 “정권 막바지에 가서 남북정상회담을 하고자 하면 북한이 칼자루를 쥐려고 할 것이고, 또 어떤 합의를 이루더라도 후속 이행이 불투명하다고 보았다”고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에 적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판단은 달랐다. “저나 김 위원장의 주도로 이번 정상회담이 열리는 게 아닙니다.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열리는 것입니다. 6자회담이 진전됐기 때문에 정상회담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노 대통령이 2007년 9월5일 정상회담 자문위원단과 회의 때 한 말이다. “남북정상회담도 북핵 문제가 풀리지 않고서는 성사될 수가 없다”(2007년 6월13일 <한겨레> 특별인터뷰)며, 정상회담에 관한 한 임기 초부터 ‘입구론’보다 ‘출구론’을 견지해온 노 대통령다운 진단이다. ‘입구론’이 정상회담 등 남북관계 개선으로 북핵 문제의 돌파구를 열자는 쪽이라면, ‘출구론’은 북핵 문제에 진전이 있어야 정상회담을 통한 남북관계 개선이 가능하다는 인식·접근이다.

노 대통령이 마냥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니다. 노 대통령은 “이 상황 변화 속에서 한국 정부의 역할은 큽니다. 근본에 있어 신뢰를 축적해온 결과”라고 자평했다.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을 이뤄내고, ‘비디에이 제재’를 푸는 과정에서 참여정부가 보여준 열정과 헌신, 전략적 행보가 남북 사이 신뢰의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불신’과 ‘신뢰’를 열쇳말 삼아 남북관계를 진단하고 2차 정상회담에서 얻어낼 ‘성과’를 가늠했다. “남북관계의 가장 큰 장애요인은 불신입니다. 불안과 불신 제거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만나는 것 자체가 성과라는 겁니다. 핵심 성과는 신뢰를 만드는 것입니다.”(2007년 9월5일 정상회담 자문위원단 회의)

노 대통령은 서해 직항로를 이용한 김대중 대통령과 달리 경의선 육로로 평양에 갔다. 2007년 10월2일 아침 9시께 경의선 도로 위 노란 페인트로 칠해진 군사분계선을 넘기 직전 노 대통령은 짧지만 격정적인 즉석연설을 했다. “이 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갈라놓고 있는 장벽입니다. 이제 저는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그날 낮 12시2분 평양 4·25문화회관 앞 광장에서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처음 만나 반갑게 악수했다. 이 모습은 분단 사상 처음으로 세계에 생중계됐다. 노 대통령은 오후 4시10분부터 5시55분까지 만수대의사당 2층 회담장에서 북한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났다. 김영남이 품에서 원고지를 꺼내 한·미 군사훈련 등 이른바 ‘근본문제’와 관련한 불만을 쏟아냈다. 다 듣고 난 노 대통령은 “이런 식으로 얘기할 거면 뭐 하러 만났습니까? 내일도 이런 식이라면 보따리를 싸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맞받았다. 김영남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회담은 10월3일 백화원영빈관에서 오전 9시34분~11시45분과 오후 2시45분~4시40분, 두차례 246분(4시간6분) 동안 진행됐다. 오전 회담에선 아무런 합의도 없었다. 돌파구가 절실했던 노 대통령은 수행원들과 옥류관에서 점심을 먹다 즉석연설을 했다. “우리는 개성공단을 ‘개혁과 개방의 표본’이라고 많이 얘기했는데, 북측의 입장에서 볼 때 역지사지하지 않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개성공단의 성과를 얘기할 때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는 용의주도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김 위원장의 귀에 들어가라고 일부러 한 말이다.

오후 회의는 오전과 판이했다. 두 정상은 많은 쟁점에서 빠르게 합의에 이르렀다. 그걸 다 모아 정리한 게 8개 조항으로 이뤄진 10·4 정상선언이다.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 민족 공동의 번영과 통일 실현”을 목표로 내세웠는데, 선언의 정식 명칭(‘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 상징하듯 ‘평화번영’이 알짬이다. 하여 두 정상이 평화번영을 이룰 수단으로 공을 들여 벼린 게 바로 선언 5조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운영 구상이다. “남과 북은 해주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엔엘엘) 일대 해역은 남북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잦은 ‘화약고’이자 한반도 임시군사정전체제의 아킬레스건이다. 정전협정에 해상경계선이 설정되지 못한 탓이다. 그 ‘엔엘엘 문제’를 “안보군사 지도 위에 평화경제 지도를 크게 덮어서 평화문제, 공동번영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자”는 노 대통령의 제안에 따른 합의였다. 갈등·충돌의 바다를 평화·번영의 바다로 바꿔나가겠다는 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은 “남북 공동선언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장 진전된 합의”라는 노 대통령의 자평(2007년 10월4일 도라산 출입사무소 ‘대국민 보고’)이 아니라도, 70년 분단사에 가장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남북 합의라 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10월4일 저녁 7시30분 평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개성공단에 들러 이렇게 말했다. “민족과 조국이 하나라는 말이 현실이 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곳이 바로 개성공단입니다. 개성공단은 남북이 하나 된 자리이고 함께 성공하는 모범이 되는 자리이지 누구를 개혁시키고 누구를 변화시키는 자리가 아닙니다. 개성공단의 실험이 성공하면 통일이 앞당겨지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지연될 것입니다.”

밤 9시26분, 2박3일 정상회담 일정을 갈무리하는 경의선 도라산 출입사무소(CIQ) ‘대국민 보고회’에선 이렇게 말했다. “다음 정부에 부담을 주는 공동선언이 아니라 다음 정부가 남북관계를 더욱 잘 풀어가고 한반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잘 만들어나갈 수 있는 그런 토대를 만드는 일을 저는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남은 임기 동안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을 포함한 10·4 정상선언은 이명박 정권의 남북 정상 합의 승계 거부로 현실화하지 못했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여섯차례의 북한 핵실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차례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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