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人 이야기]'흑백다방'으로 성공하고 '칸사이 주먹'으로 펀치 날리는 연출가 차현석

입력 2022. 10. 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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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 기념 공연은 커피 원산지 아프리카에서 하고 싶다.”

30분 전에 장소로 도착한 차현석 연출과 인터뷰는 그가 미국 출장으로 몇 차례 일정을 잡고서야 만날 수 있었다. 그를 만나게 된 것은 밀양공연예술축제 참가작으로 공연된 <흑백다방>에서였다. 2014년 초연된 2인극 ‘흑백다방’은 제14회 ‘2인극 페스티벌’에 출품되면서 두 배우(정성호, 윤상호)의 숨막히는 극적 긴장감으로 극단 ‘후암’의 대표작품이 되었다. 이후 <흑백다방>은 해외와 전국을 다니며 다방 문을 열었고 그는 마치 커피 프렌차이즈를 운영하는 사업가 같아 보였다. 흑백다방 커피 맛(배우, 작품)이 소문나면서 미국과 영국 등 영어권 배우들과 다양한 버전으로 공연되었다. 차현석은 흑백다방을 들고 국내외로 한국연극을 흑백다방에 싣고 날랐다. 이 작품은 2014년도에 초연된 후 400회 이상 공연되면서 수십여명의 배우들이 흑백다방 문을 새로운 감각으로 열고 있다. 300회 특별공연에서는 영화 서편제의 김명곤(전 문화관광부장관)선생이 윤상호와 호흡을 맞추면서 안정된 작품을 보여주었다. 그의 조부(祖父)는 한국전쟁 당시 제18전투대대장으로 빨지산 토벌을 주도한 차일혁(車一赫)대장으로 보관문화훈장(2008)을 추서받았고 6․25전쟁영웅 12명에 선정되었다.

퇴각명령으로 화엄사가 불길에 소실(消失) 위기에 처하자 천년사찰을 지켜낸 일화는 유명해 불교와 인연이 깊다. 차현석 연출 부친 故)차길진 선생은 문화기획자, 사학자, 언론인, 작가로 활동하면서 ‘차일혁 기념사업회’를 이끌었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법사(法師)로 불렸다. 할아버지는 그 유명한 보천교(普天敎) 교주인 차경석(車京石)이다. 부친은 전봉준의 핵심참모였던 차치구(車致九)였다. 항일독립운동가, 민족투사. 전쟁영웅, 종교와 불교 등에 인연이 깊은 것은 차현석 연출의 가계도로 보면 그 영향을 받아 그는 마치 작가로서 아버지의 삶을 이어가는 것 같다. 차길진 선생은 1990년도에는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를 출간했고 연극 <눈물의 여왕>도 제작을 했다. 그의 아버지가 쓴 소설 <애정산맥>이 원작이다. 그에게 희곡 한편을 보냈었다. 다른 작가 글이었다. 시대 배경과 주인공이 차일혁 대장의 시대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가 연출을 하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문자를 받고 10분도 안돼서 걸려온 그의 전화 목소리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아 보였다.

|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 차현석 연출 SNS를 보면, 아버지나 할아버지에 대한 부채 의식이 많이 느껴진다. 연극인 삶과는 동떨어진 것 같으면서도 가족사에서 예술의 연결점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요즘 더욱 그런 것 같았다.

“20대 때 한 스승님께 들었던 말씀인데,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원심력과 구심력의 싸움 그 중간에 있다는 겁니다. 한국에 있으면 해외에 나가고 싶고, 외국에 있으면 고국이 그립기도 하고요. 누군가를 만나면 거리를 두고도 싶고, 거리가 생기면 또다시 보고 싶은 거죠. 어떨 때는 독특한 가족사가 부담되었다가,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가 되었다가, 그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조부모님께서 독립운동을 하시고 전쟁 중엔 문화재를 지키신 것이 재조명되어서 제가 유족으로 감사함을 전달 받고 있습니다. 할아버님은 빨치산을 사살하기보다는 전향하도록 하셨어요.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의 시신을 직접 수습해 장례를 치러주기도 하셨다고 해요. 전쟁 중이고 적장이었지만, 시신을 방치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단 거죠. 휴전 이후에도 너무 힘들어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업적을 알리신 분은 아버지세요. 아버지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시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절에서 삼일장을 치르셨어요. 주관하던 스님께서 졸았대요. 그걸 보고 아버지가 선친 장례는 직접 치러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해요. 성인이 된 후에 불교에 귀의하셨는데, 할아버님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죽어간 수많은 군인, 빨치산까지도 제를 올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분들을 천도하신 게 아버님 인생에 있어서 큰 부분이에요.” (그는 물 한잔을 마시고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칸사이 주먹>에 윤봉길 의사가 처형당하기 직전에 찍은 사진이 등장합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그 사진을 가지고 오실 때 동행했습니다. 간도 협약 100주년 때, 공소시효 소멸 몇 주를 앞두고, 아버지가 사비를 들여 헤이그 국제 사법재판소에 간도 문제를 제소하기도 했어요. 훗날 국제 정세가 급변하게 되면, 불법 조약으로 빼앗긴 우리 땅을 되찾을 수 있도록, 작은 씨앗을 뿌려 놓으신 거죠. 아버님과 할아버님의 관계성을 생각하면, 꼭 햄릿과 선왕의 유령이 만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할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1998년에 아버지가 <눈물의 여왕>이라는 작품을 제작하셨어요. 이후에는 한국전쟁을 다룬 오페라 <카르마>를 만드셨고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서 ‘문화영토권’에 대한 말씀을 하셨어요. ‘현석아, 이제 땅만이 땅이 아니다. 우리 문화가 뻗쳐나갈 수 있는, 우리 문화가 꽃 피운 곳이 곧 우리 땅이다.’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요즘 와서 보면 한류가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큰 나무셨어요. 큰 나무가 사라지고, 독특한 집안 내력을 가진 제가 연극만을 하고 있지만, 요즘 들어 아버지의 그늘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제가 아버지와 할아버지만큼 큰일을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데, 생각만이라도 그 뜻을 쫓아가려고 해요.”

- 그는 할아버지(차일혁 대장)의 역사를 소환할 때 쏟아내는 얘기들이 늘어났고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는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지 톤과 시선이 바뀌었다.

“할아버지의 삶을 희곡으로 담고 싶다고 말했었죠. 한 세기를 이렇게 격동적으로 겪은 나라가 있을까 싶은 정도로, 한국은 많이 변화했어요. 많은 분의 노고와 희생으로 현재 대한민국이 만들어졌지만, 근대라는 게 없이 급격한 경제발전과 함께 바로 현대로 와버린 느낌이에요. 내전을 겪은 민족으로서 못다 말한 이야기도 있을 거고요. 내전이 없었더라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 체제가 붕괴할 때 우리도 연방제 형식으로나마 통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나 그런 현안들을 잘 풀어주시길 바라죠. 연극을 하는 사람으로서, 공연을 통해 제 가족사를 바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뜨거운 마음이 가족들에게까지도 전해지고 있나요.

“올해 12월이면 아버님 3주기가 되는데, 워낙 큰 역할을 해주셨다 보니 돌아가신 후 주변에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어머니께서도 많이 힘들어하셨고요. 항상 우리는 좋은 것만 도모하며 살아가지, 언젠가 이 여정이 끝난다는 것은 간과하면 살아가고 있잖아요. 연극에는 등·퇴장이 있잖아요. 빨리 퇴장한 사람이 나중에 등장하기도 하고요. 퇴장하기 전까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평생 고민을 해 나가야죠.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민을 살찌워줄 가족과 동료들, 나이를 초월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벗들이 필요하겠죠.”

― <흑백다방>, <자이니치>, <칸사이 주먹>, <노르망디> 등 다양한 작품을 쓰고 연출했지요. 차 연출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까요. <하와이상> 같이 전쟁을 다룬 작품들도 했잖아요. 차현석 작품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공연은 무대 안에서 죽는 사람들이 없어요. 이미 죽은 사람들 얘기가 나와요. 한국사의 한 장면이 배경이고, 크든 작든 태극기가 등장해요.(웃음) 옛날에 저희 할아버지께서 항상 아버지에게 ‘문화가 사라지면 나라를 잃는다’는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연극을 통해 한국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태극기 부대냐고 그러는데, 아니요. 저는 태극기를 정말 사랑합니다. 해외 공연갈 때도 태극기 배지를 달고 가요. 7월에도 루마니아에서 공연하고 왔는데, 한국 연극을 처음 보는 루마니아 사람들도 많지 않겠습니까. 제 행동과 말 하나하나가 우리나라의 얼굴이 돼버리는 겁니다. 민간 외교관으로서 꽁초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질서를 잘 지키고, 극장 관계자들에겐 좋은 매너를 보이려고 했어요. 사실 예전에 국가기관에 시험을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거기 계신 선배들이 저더러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관료들은 월급쟁이인 데 반해, 소위 말해 저는 너무 애국자스럽다고요.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선배가 아주 멋진 말씀을 해주셨어요. 극장을 운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인데 ‘연극에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게 더 큰 애국일 수 있다, 너희 할아버님께서는 네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싸우셨고, 지금 그런 세상이 되지 않았느냐, 왜 한 조직에 들어가서 다양한 영역들을 축소하려고 하냐’는 거였죠. 정말 맞는 말이에요.”

|차현석의 <흑백다방> 이야기

차현석 연출의 흑백다방을 본 뒤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연극 ‘흑백다방’ 꼼꼼한 구성으로 숨죽이는 두 배우의 ‘연기열전’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오늘날 만남을 통해 80년대를 그려내고 있다. 2014년 초연된 2인극 ‘흑백다방’은 제14회 ‘2인극 페스티벌’에 출품되면서 연기상을 비롯해 2인극 선풍을 이끌었다. 두 배우의 숨막히는 팽팽한 극적 긴장감의 온도는 극단 ‘후암’의 대표작이 되었다. 80년대 폭력성으로 갈라진 내면의 상처를 가해자와 피해자 두 인물로 무대로 세우면서 파괴된 시대의 암울한 상처를 그려내고 있었다. 시대에 파괴된 80년대 폭력성을 통해 두 인물은 ‘내면의 진실게임’을 하듯 극적인 긴장감으로 배우의 앙상블은 극중 인물의 생명력으로 작품을 완성시키고 있다. 80년대 한국사회가 겪은 민주화 과정의 진통은 아픔의 역사다. 폭력으로 얼룩진 피해자의 진통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성숙해진 민주화의 시계바늘에 약을 바르고 치료제를 써도 완전히 씻겨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숨겨진 진실의 오늘날을 투영한다. 80년대 시대의 폭력과 내면의 손상된 장애와 상처의 역사가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가 진실하게 손을 내밀고 치료하지 않는다면, 화해와 용서의 경계는 역사 속으로 숨어 들 수밖에 없다. 진실게임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는 반복되고 그 경계는 모호해진다

― 차현석 하면 <흑백다방>이 떠오릅니다. 두 배우의 밀도 있는 연기도 그렇고요. 공연이 성공한 후에 많은 배우들이 거쳐 갔고, 미국 공연도 했었다.

“미국에서는 란 제목으로 공연했어요. 2016년도부터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에서 <흑백다방>을 선보였고, 2018~2019년에는 에든버러 코리안 시즌의 초청을 받았어요. 2018년 일본에서는 한국 배우들이 일본말로 공연을 한 적도 있어요. 발음이 어색할 수 있지만, 그걸 문제 삼는 일본인들은 없었어요. 과연 한국말로 된 작품이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됐을 때 어떤 장점이 있는지, 작품을 현지화 하는 데 있어서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지 시험해본 거죠. 스코틀랜드에서는 영어로 공연을 했습니다. 영어로 하면서 정말 많은 공부가 됐죠. 2018년도엔 영국 배우들과 한국 배우들이 하루 씩 번갈아 가며 교차 공연을 했는데, 봤던 사람들이 한 번 더 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이듬해에는 런던과 에든버러 등지에서 영국 배우들만 무대에 섰습니다.”

― 흑백다방을 다양한 언어로 공연 한 이유가 뭔가.

“한국말로 쓰인 작품을 해외 사람들이 자막으로 접할 때 분명한 장점이 있어요. 작가의 의도가 손실되지 않고 더 잘 전달되는 거 같아요. 우리도 외국 영화를 자막으로 보면서 감동을 받으니까요. 한국을 넘어 다양한 국가에서 다양한 언어로 공연하고픈 바람이 있어요. 제가 하나의 현지화 사례가 된다면, 우리나라 작품들이 좀 더 쉽게 해외로 갈 수 있는 길이 생기겠죠. 일단 <흑백다방>은 2인극이라 괜찮습니다. 물론 해외 공연을 할 때마다 차 한 대 값이 사라지곤 하지만(웃음). 올해 4월에 미국 공연을 다녀오면서 욕심이 하나 생겼는데요. 2024년이면 <흑백다방> 10주년에 되는데, 그즈음 전 세계 100군데 장소에서 동시에 공연을 하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싶어요. 미국 공연을 하면서 한국 팀이 줌으로 연습을 했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는 가능하더라고요. 전 세계에서 동시에 줌으로 공연을 하고, 기네스북에다가도 한번 신청을 해보고 싶어요. 한국 공연에서는 노고지리의 ‘찻잔’, 미국 공연에서는 밥 딜런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주제곡인데, 100개 도시에서 모두가 이 노래를 함께 불러보면 어떨까, 그런 계획을 세워봤습니다. <흑백다방>에 피해자와 가해자 구도가 나오잖아요. 지구 어디에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어요. 더 원대한 꿈은 일론 머스크의 우주왕복선, 스페이스X에서도 공연을 해보고 싶어요. 지구에게는 우리 인간이 가해자이기도 하니까요.”

― 10주년 기념 공연은 커피 산지인 아프리카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도 공연해도 재밌을 것 같군요.

“그런 이벤트가 성사되면 제가 느끼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더 큰 이벤트를 해낼 수도 있겠죠. 지금 K-컬쳐가 각광받고 있지만, 무대 예술은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잖아요. 비록 저는 오프 브로드웨이에 참여했었지만, 현지 프로듀서들이나 디렉터들과 지속적인 네트워킹이 가능하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한 시간짜리 좋은 연극이 있다면, 해외에서 15~20분 정도 낭독 공연을 해보고, 그걸 본 현지 예술가가 한국 희곡으로 공연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제가 브릿지 역할도 하고 싶어요. <흑백다방>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번역돼있어요. 계속 수정 중이라 출판은 아직 안 됐는데요. 아마 두 권짜리 단행본이 될 겁니다. 한 권에는 희곡 텍스트만 담고, 공연 리뷰 등이 담긴 별책 부록이 함께 나오겠죠. 또 남녀 버전, 시력을 잃은 다방 주인 콘셉트도 있어요. 여러 버전의 텍스트를 통해, 사람 간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 <흑백다방>과 80년대의 폭력성은 어떻게 만들어진 이야기인가요.

“차일혁 할아버님께서 진해경찰서장으로 계실 때, 자주 가셨던 곳이 ‘흑백다방’이에요. 유택렬 화백이 만드신 다방인데, 피아니스트인 따님께서 그곳을 운영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지금은 진해시 문화예술공간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대학로 학림다방처럼 우리나라의 역사와 체취가 남아있는 장소죠. 그 공간이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제가 나온 시어터 홍정혜 대표님을 선배로서 정말 좋아하는데, 그분이 80년대 대학생이셨을 때 시위하다가 청량리경찰서에 잡혀가신 적이 있어요. 최악의 상황을 겪진 않으셨지만, 너무 두려우셨대요. 2011년도쯤 홍정혜 대표님과 대화를 하다가, 자신을 겁줬던 형사 때문에 진짜 무서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세월이 바뀌어도 옛날 기억은 잊히지 않는구나 싶어, 그걸 모티프로 이야기를 구상했습니다. 그런데다가 정성호, 윤상호라는 배우를 각각 다른 공연에서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거예요. 제가 생각하는 작품이 있는데 두 사람을 모델로 한번 써보고 일 년 뒤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어요. 그분들은 농담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정말로 일 년 뒤에 대본을 들이밀었어요. <흑백다방>을 가지고 ‘월드 2인극 페스티벌’에 나갔는데, 참가하는 데 의미를 뒀었어요. 한 달 좀 못 되게 연습하면서 대본을 계속 고쳤는데도, 두 분이 그걸 바로바로 숙지해주셨죠. 정말 감사했어요. 결국 대상, 희곡상, 연기상을 받았어요. 그 후에도 많은 공연을 하면서, 관객 반응을 최대한 반영해 계속 수정을 했습니다.”

― <흑백다방>을 통해 수많은 배우들이 거쳐 갔는데.

“스물일곱 팀 정도가 공연했는데요. 저한테 전화 한 통이 왔어요. 대학교 학생들이라고 하는데 학교에서 열리는 2인극 페스티벌에서 <흑백다방>을 공연하고 싶다 하더라고요. 작가님한테 전화해야 한다고 들었다면서요. ‘작가료를 얼마나 드려야 할지’ 묻는데, 제가 장난으로 그랬어요. ‘좀 많이 받아야 하는데, 얼마 주실 수 있는데요?’ 알바를 해서 50만 원 정도 줄 수 있다고 하길래, ‘안 되는데. 한 500만 원 주셔야 해요’라고 하자 침묵이 흘렀어요(웃음). ‘대신 나중에 1억 벌면 주세요’라고 말했죠. 사실 그냥 하라는 얘기였어요. 신해철 씨가 했던 말을 벤치마킹 한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가서 학생들 공연을 봤더니, 너무 잘 만든 거예요. 저는 무슨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는 줄 알았어요. 기존 <흑백다방>과 전혀 다른 개념의 양면 무대를 사용했더라고요. 언젠가 작가가 세상을 떠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더 이상 작가와 소통하지 못할 때는 작품이 이렇게 만들어질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그 팀이 가장 만족스러웠습니다.”

― 김명곤 선생을 캐스팅하게 된 계기가 재밌더군요.

“김명곤 배우님은 제가 어릴 때부터 좋아하고 존경했던 선생님이에요. 대학로 술집 달빛마루에서 출연을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수락해주셨어요. 옆 테이블 사람들이 술 먹고 있는데, 바닥에서 절도 드렸습니다(웃음). 김명곤 윤상호 배우 조합에서는 좀 더 나이 차가 부각되고, 각각의 연기 스타일도 분명해 보여요. 그러한 신구의 조화가 앞으로 <흑백다방>이 나가야 할 방향성에 많은 걸 시사하고 있습니다. 내년이나 후년에 계획 중인 이벤트로, 연출가 일곱 분께 부탁을 드려서 <흑백다방> 페스티벌을 열고 싶어요. 대학에서 열심히 활동하시고, 대본도 직접 쓰시는 분들을 섭외해서 계약서도 쓸 거예요. 작가가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고치셔도 괜찮아요. 2인극을 13인 극으로 만들어도 상관없습니다. 대신 좋은 대본이 나오면 훗날 제가 그걸로 공연해 보려고요. 일곱 개 팀들의 다양한 <흑백다방>을 기대 중입니다.”

― <흑백다방> 이후 작품들을 보면,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다루는 것 같다.

“사실 교과서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 역사적 사실들이 많지요. 다행히도 요즘은 정보화 시대다 보니, 얼마든지 정보를 열람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역사를 찾아보기 위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제 연극이 근현대사의 이야기를 알리는 창구로서 역할을 다하고 싶습니다. 희곡의 완성도를 좀 더 높여서, 나중에 제가 연출하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를 통해 이야기가 재조명된다면 정말 보람차겠죠. <흑백다방> 이후, 자이니치 시리즈 3부작 <자이니치> <칸사이주먹> <코리아특급>에 이어, <노르망디>, <시간의 절벽>, <하와이상> 등을 썼어요. 올해 초에는 <조선협객>이라는 작품을 선보였어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음악 낭독극인데요. 독립군들만 독립운동을 했던 게 아니라, 기생·문인·가극단 사람들, 심지어 일본인들까지 해방을 위해 애썼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가 차현석, 나는 배우를 꿈꾸고 있다.

스무 살 때 부산에서 연극 워크숍을 접하면서 배우의 꿈을 키워온 차현석 연출은 1994년도에 동숭아트센터 대극장 무대에서 단역으로 연기를 경험한 후로 작가, 연출, 극단 대표를 하면서도 배우를 꿈꾸고 있다. 제3회 여주인공페스티발 초청작품인 극단 행복한 사람들의 <장미를 삼키다>(작 김수미, 연출 김관)에서는 배우로 출연했다. 차현석의 이미지는 다양하다. 때로는 달변적인 말로 기획적이고 경영적인 감각을 보이기도 하고, 아버지와 차일혁 대장 일대기를 섬세하게 쏟아 놓을 때는 작가적 기질을 보인다. 훈남 외모에서 독백처럼 쏟아 놓는 말을 들을 때는 배우의 감각이 느껴졌고 운영하는 극장을 말할 때는 경영자의 책임감도 묻어나 있었다. 차현석은 본능적인 감각이 빨랐고 그때마다 다양한 이미지를 보였다.

─ 배우들의 디렉션을 하는 연출가와 작가에서 얼마 전 연극무대에서 배우로 섰는데.

“연기에 소질은 없지만, 무대에 섰을 때 느껴지는 떨림, 긴장감, 그리고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일이 나이를 먹어도 좋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앞으로도 틈틈이 배우 수업 받으려고 합니다. 배우로서 얻는 가장 큰 즐거움은 작은 세상인 객석과 교감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경험을 체화해서 다른 연극을 또 만들어간다는 의미가 있고요. 그리고 배우들이 어떤 면에서 가장 힘들어하고, 연출가에게 기대하는 게 뭔지 알게 됐어요. 배우들이 모이면 연출가와 작가 험담을 어떻게 하는지도 알았고요(웃음). 그런데 어떤 분이 말씀하시더라고요. ‘배우가 되는 진입 장벽이 너무 낮아졌는데, 이건 잘못된 게 아니냐?’ 특정 장르에 강한 나라들을 보면 진입장벽이 그리 높지 않아요. 저변이 확대되려면 다채로운 그룹이 있어야 하고, 소위 말해 낮은 리그와 높은 레벨이 공존하면서 질서가 구축되어 있는 거죠.”

― 무대에 올라가는 경험이 글쓰기로 이어지나요.

“제가 직접 쓴 작품을 가지고 연기 연습하면서도, 대본을 고민하게 돼요. 무대에서의 삶이 짧지만 정말로 하나의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극한 환경을 상상하고 극한 감정에 이입해야 해요. 가짜를 진짜처럼 보여주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것이 경험으로 남게 되죠. 다양한 배우들이 그려내는 인생의 일부를 객석이 아닌 무대에서 함께 지켜보는 것. 이러한 경험들이 글쓰기나 연출을 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영향을 끼칩니다.”

― 작가와 연출가로 활동할 수 있는 극장 공간을 대학로에 확보하고 있어 안정적으로 보인다. 경영 마인드보다는 연극을 하겠다는 마음이 굉장히 인상적인데.

“2003년 지하 2층에 개관한 후 암 스테이지에서부터 시작했는데 내년이 벌써 개관 20주년입니다. 처음엔 언제든 작품을 올릴 수 있고, 극단 식구들이 상주할 수 있는 터전이 생긴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극장에 맞는 콘텐츠를 개발해야 하더라고요. 창작을 위한 고민을 배제해버리면, 극장 운영은 임대 사업이 돼버립니다. 예술가로서는 극장 경영이 반드시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해요. 요즘 대학에 예술경영학과들이 생기고 있잖아요. 예술가가 경영해야 하는 건지, 경영자가 예술을 수용해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예술가는 끊임없이 자유로워야 하고,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직관이 있어야 합니다. 경영자는 좀 더 보수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죠. 그런데 그런 게 예술가에게 필요한 덕목은 아니지 않을까요. 예술과 경영이 팀플레이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21세기로 오면서, 혹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흥망성쇠 한 극장들이 많은데요. 많은 극장이 생겼다가 빨리 사라지더라고요. 짧은 생애에 예술을 하기도 모자란대, 20년 동안 극장을 운영해온 것에 대해 스스로 돌아볼 때인 거 같아요. 만약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저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극장 운영을 시작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극장 대표님들과 친하게 지냈겠죠(웃음).”

― 대학로 일각에서는 상업적이거나 대중적인 스타 마케팅을 선택하고 있다. 차 연출의 극장 운영은 예술적으로 방향을 잡는 것 같다. 득보다는 실이 많을 거 같다. 정확히 말하면 대중과 예술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점들이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를 먼 발치에서 봐오신 분들은 좋게 생각해주시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상당한 오해를 하시죠. ‘어마어마한 자본과 여유가 있으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는구나.’ 하지만 저희도 빠듯합니다. 누군가 한 공간을 사용할 때, 반드시 어떤 이는 비용과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카페에서도 커피 원가만이 아니라 공간 사용료, 전기료 등을 고려해서 커피 값을 책정하잖아요. 개인이 극장을 소유하고 있다면, 아마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 겁니다. 저는 극장 수입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비용을 쓰면서 얻는 즐거움도 있겠죠. 일시적이고 한정적이고 순간적이긴 하지만요. 극장을 운영하면서 정말 많은 예술가와 교류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예술가라면 생각과 의식, 몸이 언제든 떠났다가 자유롭게 돌아올 수 있어야 하는데, 극장을 소유하다 보면 아무래도 한 공간에 매여 있게 돼요. 늘 같은 장소에 있다 보면 타성에 젖어버려요. 세상 모든 게 끊임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것처럼, 연극에 담아낼 의식도 신선하고 직관적이어야 합니다. 때로는 시대를 앞서가야 하죠. 제가 극장 경영을 하지 않았다면, 정적인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예술들을 끄집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좀 더 어렵게 가야 했던 길을 쉽게 갔던 부분들이 결과적으로는 저를 나태하게 만든 측면이 있어요.”

― 그래도 한 공간 안에서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작품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장점이지요. 명작은 한 공간에서 나오는 거예요(웃음).

“맞습니다. 6층 스튜디오가 30석 정도 됩니다. 거기서 정말 재밌고 놀고, 생각을 많이 키웠죠. 대학로는 극장의 메카이지 않습니까. 극장을 운영하는 분들이 철학을 갖고 예술가들을 발굴해주셨으면 합니다. 공연을 보는 안목들을 갖고 계시니까, 소규모 연극 페스티벌을 주최하실 수도 있을 거예요.”

― 차 대표의 활동을 보면 작가로서 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기획·운영 감각이 보일 때가 있다.

“‘타이니 엘리스 페스티벌’을 기획했듯이 좋은 공연을 잘 엮어서 사람들에게 보여드리는 브리지 역할을 하고 싶어요. 스타시티라는 극장이 거기에 언제까지 얼마만큼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해외로 나가는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우리나라의 좋은 작품들을 알리는 초석을 마련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 <눈물의 여왕>을 제작한 아버지의 이야기, 천년 사찰을 지켜낸 차일혁 대장의 이야기를 손자를 통해 들었을 때 3, 4대까지 내려오는 민족에 대한 부채 의식이 느껴졌다. 차 연출 자녀들에게는 어떤 의식을 심어주고 싶은가.

“요즘 아침에 아들을 차로 태워주면서, 한국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아시아를 초월해 세계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해요. 그러려면 그에 걸맞은 인류애가 있어야 하는데, 입시 준비를 하다 보면 그게 쉽지 않겠죠. 조금이라도 기회가 될 때 좋은 말을 해주려고 하는데, 분명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거예요. 가슴 한편에 남을 수 있는 말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말보다는 행동하려고 노력하고요. 운전할 때 천천히 하고, 누가 끼어들라치면 웃으면서 양보하고, 어른들에게 인사 잘하고 이런 모습을 보이려고 합니다(웃음).”

― 아빠로서 행복합니까, 연극인으로서 행복합니까, 아들·손자로서 행복한가?

“이제는 아빠로서, 연극인으로서, 할아버지의 손자로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행복해지고 싶어요. 20년 간 극장 운영을 하는 동안 잘 버텨오긴 했지만, 사실 행복하기보다는 힘든 점이 많았어요. 제가 그 힘듦을 참아낼 수 있는 이유가, 아빠이자 연극인이며 손자이고 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정체성을 오가면서 앞으로도 잘 헤쳐 나가겠습니다.”

조용하던 이른 커피숍은 손님들로 넘쳐나고 있었고 인터뷰하는 탁자 주변의 시선들은 차현석 연출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등 뒤로 일어나는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창밖 대각선으로 보이는 몽양 여운형(呂運亨) 선생의 암살 서거 표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가적 빛으로 남아있는 조부에 대한 일대기 플롯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흑백다방>으로 작품을 쓰고 연출하는 차현석을 알리고 <칸사이 주먹>으로 후암시어터에서 펀치를 날리고 있는 그는 작품을 새롭게 구성해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주 금산연극제에서 비공식 특별 초청 공연으로 <흑백다방>에서는 극단후암 신입 단원으로 들어온 심태식 배우와 함께, 다방 주인으로 출연한다. 사진 촬영은 배우처럼 능숙했고 시선과 각도는 영화 포스터 촬영처럼 느껴졌다. 그는 “제가 굉장히 논리적인데 오늘은 많은 말들을 쏟아낸 것 같다”고 말하자 동행한 월간 한국연극 프리랜서 김상옥 기자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다고”며 말을 받았다. 혜화동 로터리 횡단보도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봉향 여운형 선생의 표지석을 바라봤고 요구르트를 마신 뒤 그의 작품 ‘노르망디’ 상륙 작전처럼 사라졌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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