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이탈리아 국민의 도전과 실험

기자 2022. 10. 3. 03: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9월 마지막 주, 세계 언론과 정치의 화두는 이탈리아 총선이었다. 유럽의 주요 인물들뿐 아니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민주주의가 기로에 섰다’고 우려했다. 지난 25일 이탈리아 총선에서 극우 성향의 이탈리아형제들(FdI)이 압승을 거두고 그 대표인 조르자 멜로니의 총리 취임이 확실시되었기 때문이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논란의 핵심은 멜로니와 이탈리아형제들이 그 접두사가 무엇이든 파시스트라는 점이다. 뉴욕타임스의 한 기사는 멜로니를 보도하며 ‘파시스트’나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28번이나 사용했다고 한다. 실제 멜로니는 무솔리니를 추종하는 네오파시스트 정당인 이탈리아사회운동(MSI)에서 정치를 시작했으며, 이번 총선의 주요 공약들도 종교, 가족, 국가를 강조하고 LGBT와 이민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러나 멜로니는 수차례 과거 파시즘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도 우크라이나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럽연합과의 관계에서도 유연한 입장을 보이고 있어, 오성운동(M5S)과 동맹(Lega)이 집권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향후 멜로니 내각이 영국처럼 유럽연합을 탈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번 총선의 승패는 포퓰리즘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좌우했다. 친러 경향을 보인 오성운동과 동맹, 전진이탈리아(FI)의 지지율은 최소 3분의 1에서 절반 넘게 하락한 반면,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정당들은 지지율이 상승했다. 민주당(PD)은 0.4%포인트로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쳤지만(19.1%), 이탈리아형제들은 26.0%를 얻어 지난 총선 지지율 4.4%의 6배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했다. 반면 오성운동과 동맹은 집권 후 포퓰리즘 성향이 줄고 기성 정당화함으로써 각각 15.4%와 8.8%로 떨어졌다(2018년 오성운동 32.7%, 동맹 14.0%). 전진이탈리아도 친러 성향을 보임으로써 8.1%로 떨어졌다(2018년 14.0%). 세 정당 지지자들 중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거나 포퓰리즘 성향을 지닌 유권자들이 이탈리아형제들로 옮겨간 것이다.

멜로니와 이탈리아형제들이 과연 파시스트인가는 다시 한번 짚어볼 문제다. 1995년 이탈리아사회운동이 분열해 온건파가 민족연맹(AN)으로 분리해 나가고 정통파가 삼색횃불사회운동(MSFT)을 창당했을 때 멜로니는 민족연맹에 참가했다. 그리고 2009년 민족연맹 당원들이 전진이탈리아와 통합해 자유국민당(PdL)을 창당했다가 2012년에 다시 탈당해 이탈리아형제들을 창당할 때 파시즘 색채는 더 약해졌다. 현재 이탈리아형제들의 6개 정파는 중도를 포함하고 민족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라는 다양한 수식어를 단 보수주의 정파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정통 네오파시스트는 배제되었다. 그러므로 멜로니와 이탈리아형제들을 연속성과 단절성을 동시에 가진 접두사 ‘포스트’를 붙여 포스트파시스트라고 규정할 수는 있지만 네오파시스트로 보기는 어렵다. 적어도 과거 파시스트의 위험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유럽과 미국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탈리아형제들의 민족주의 포퓰리즘과 연정 파트너인 동맹과 전진이탈리아의 친러 성향 때문이다. 민족주의 성향이 유럽연합을 약화할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무엇보다 포퓰리즘의 강화가 기성 정치 엘리트를 위협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파시스트 논란을 떠나 우리나라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부러운 점도 보인다. 미국과 유럽연합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하는 민족주의 성향은 이탈리아 보수의 핵심이다. 자국의 독립과 자존을 지키려는 민족주의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대부분에서 보수주의의 본령이다. 그리고 포스트파시스트일지라도 국민을 두려워할 줄 안다. 그런데 최근 윤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에서 드러났듯이 한국의 보수는 국민보다 미국을 더 두려워하고 국민의 자존보다 사대적 동맹에 더 가치를 둔다.

이탈리아 국민의 실험과 도전 정신도 눈여겨볼 만하다. 1994년 반세기 기민당의 부패 정치에서 벗어난 이탈리아 국민은 신생 정당 전진이탈리아에 집권 기회를 주었고, 2008년에도 역시 신생 정당 오성운동에 압도적 지지를 보내 새로운 정치 실험을 시도했으며, 올해 총선에서는 이탈리아형제들을 통해 기성 정치에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미워도 다시 한번’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도전 앞에서 망설이는 우리의 모습이 안쓰럽다. 우려 속에 2024년 총선이 다가온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