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줄리아드 등과 경쟁하려면 대학원 설치해 인력 유출 막아야”

김성현 문화부 차장 2022. 10. 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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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클래식’ 열풍 이끈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2022년 9월 21일 서울 성북구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실에서 김대진 총장이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지호 기자

지난 21일 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캠퍼스 곳곳에는 개교 30주년을 알리는 플래카드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예술이, 다!’라는 짧은 문장 사이에 쉼표가 들어간 개교 자축 슬로건이 조금은 독특했다. 피아니스트 김대진(60) 한예종 총장은 “전 교직원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모를 통해서 선정한 문구”라며 “‘예술은 모든 것’과 ‘모든 학생과 교정(校庭)이 예술이자 무대’라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한예종은 학교 직제가 확정된 1992년 10월 30일을 개교 기념일로 삼고 있다.

자부심 넘치는 이 슬로건처럼 예술 전문 교육기관을 표방하는 한예종은 지난 30년간 한국 문화 예술계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당장 올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 기록을 작성한 피아니스트 임윤찬(18)도 현재 이 학교 2학년생이다. 김 총장은 개교 직후인 1994년 이 학교 교수로 부임한 뒤 한예종의 역사를 직접 만들고 지켜보았던 ‘산증인’이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는 개교 30주년 준비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했다.

-개교 30주년을 앞두고 학교에서 준비 중인 일은.

“우선 석관동 캠퍼스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무대에 서는 공연장의 이름을 지난 2월 별세한 이어령(1934~2022) 초대 문화부 장관의 이름을 따서 ‘이어령 예술극장’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현재 서초동 캠퍼스의 공연장은 초대 총장을 지내신 음악학자 이강숙(1936~2020) 선생님의 이름을 따서 ‘이강숙홀’로 부르고 있다. 꼭 우리 학교가 아니더라도 전 세계 공연장에는 예술가들의 혼이 어려 있다고 믿는다. 두 예술 선각자의 정신이 우리 학교에 살아 숨 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어령 장관과 한예종의 인연은.

“한예종 설립을 위한 설치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던 1991년 12월 19일 당시 주무 장관이 이어령 선생님이셨다. 이날 개각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15분간 논의됐던 안건이 바로 한예종 설립안이었다. 이날 국무회의에서 설치령을 심의·의결하면서 학교 설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 그래서 생전에 이 장관께서는 한예종 학생들을 ‘15분의 아이들’이라고 부르셨다.”

-개교 당시부터 예술 전문 교육기관을 표방했는데 처음부터 순항했나.

“천만의 소리다. 처음엔 더부살이 신세라서 공간을 전전하기 바빴다. 이듬해 문을 열었던 한예종 음악원은 별도 건물이 없어서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5층과 음악당 2층에 강의실과 연습실을 만들었고 교수실은 지하 구석 귀퉁이에 있었다. 비만 오면 복도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양동이로 받아서 내다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연극원도 장충동 국립극장 별관에 더부살이했다.”

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캠퍼스에는 지난 2월 타계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이름을 딴 ‘이어령 예술극장’이 들어선다. /김지호 기자

-빗물 내다 버리는 것도 직접 했나.

“어쩔 수 없었다. 내 방이 양동이 바로 앞에 있어서(웃음).”

-처음부터 한예종 교수로 들어올 생각이었나.

“지금 와서 솔직히 말하면 아니었다. 미 뉴욕 맨해튼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국내 대학에 두 번 지원했는데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낙담하던 참에 이강숙 총장님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마음을 정하라’고 강하게 몰아붙이시길래 두려움 반, 설렘 반 심정으로 고민 끝에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한예종만의 독특한 교육 방식이 있었다면.

“정명화(첼로), 김남윤(바이올린), 강충모(피아노)처럼 개교 초기부터 합류한 스타 교수들의 열정도 놀라웠지만, 현실적으로도 신생 학교이기 때문에 절박한 마음이 컸다. 당장 택시를 타도, 출국 심사를 받을 때도 한예종은 아무도 몰랐으니까. 우리 내부에서도 학교인지, 학원인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않았다. 의문과 혼돈의 시기가 꽤 오랫동안 있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학기 말 실기 시험이나 국내외 콩쿠르 등 중요한 일정이나 행사가 있으면 모든 교수님이 달라붙어서 학생들의 연주를 함께 듣고 평가하는 풍토가 일찍부터 마련됐다.”

-사제(師弟) 계보를 엄격하게 따지는 예술 교육에서는 파격적인데.

“학기가 끝날 때마다 교수들이 모든 학생의 연주를 일일이 듣고서 의견을 적은 평가서들이 책 한 권 두께가 될 만큼 쌓였다. 피아노 전공 교수들은 매년 담당 학생들을 바꿔가며 가르치기도 했다. 예술적 정체성이 확립되기 이전의 어린 학생들에게 자칫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일대일 전담 수업 방식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만큼 파격과 혁신적인 교육법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한예종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계기가 있다면.

“피아니스트 손열음(36)이 2000년 독일 에틀링겐 청소년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이 1994년 우승한 대회로 유명하다. 한예종이 세계 무대에서 거둔 첫 번째 성과였던 것 같다.”

-손열음뿐 아니라 피아니스트 김선욱·문지영·박재홍까지 제자들을 연이어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시킨 스승으로 유명한데.

“그 아이들은 설령 내가 아니었더라도 원래 크게 될 인물들이었다. 그만큼 모두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주가 넘쳤고 개성이 분명했다. 스승이 제자들을 고른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스승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겸양 아닐까.

“오히려 콩쿠르나 독주회, 협연 같은 굵직한 무대에 서기 전에 학교에서 충분히 ‘평가전’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교수님들이 모두 참관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야말로 한예종의 성장 비결이 아닐까 싶다. 음악·무용·연기 등 예술가들은 언제나 무대나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 존재들이다. 평소 가지고 있던 끼와 재능을 맘껏 발휘하려면, 크든 작든 꾸준하게 무대에 서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개교 30주년을 맞아서 학교의 변화나 발전을 실감하는가.

“흔히 30년을 한 세대라고 부르는데, 한예종에서 공부했던 학교 출신들이 다시 교수로 부임해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볼 때 세대 변화를 느낀다. 임윤찬의 스승인 피아니스트 손민수뿐 아니라 배우 오만석, 극작가 배삼식, 현대무용가 신창호와 발레리나 조주현 같은 교수들이 모두 한예종 출신이다. 한예종 2세대 교수들이 이제부터 성과를 낼 것으로 본다.”

-한예종의 향후 과제는.

“현재 연극원·영상원·미술원·전통예술원은 서울 강북의 석관동 캠퍼스, 음악원·무용원은 강남 서초동 캠퍼스로 ‘두 집 살이’를 하고 있다. ‘장르 사이 칸막이와 경계를 없애고 예술의 작은 왕국을 만들라’고 당부하셨던 이어령 장관의 생전 말씀에 비춰 보면 중장기적으로는 통합 학교 부지가 절실하다. 음악원 학생들이 영상원의 단편영화에서 자연스럽게 작곡과 연주를 맡고, 연기·무용·미술이 어우러지는 종합 예술극을 만드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예종 개교 초기에 합류한 ‘원년 멤버’이자 총장으로서 꿈이 있다면.

“생전에 이강숙 초대 총장께서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것이 ‘해외 유학 갈 필요가 없는 학교’였다. 이 말씀을 이어받아서 ‘해외에서 유학을 오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 마지막 꿈이다. 현재 공연 예술 부문 세계 대학 평가에서 한예종은 40위권이다. 이 순위를 끌어올려서 미국 뉴욕 줄리아드나 영국 왕립음악학교, 오스트리아 빈 음대와 견줄 수 있는 명문 학교로 만들고 싶다.”

-지나치게 원대한 포부는 아닐까.

“30년 전 한예종이 문을 열었을 때 해외 유학 경험 없는 10~20대 국내파 학생들이 세계 유수 대회에서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흔히 삶에서 중요한 건 속도보다 방향이라고 하는데, 학교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현재 한예종은 학사 과정은 정식 학위를 인정받고 있지만, 고등교육법상 대학원 석·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수한 학생들을 받아서 4년간 가르쳐 놓고도 이들이 학업을 계속하려면 해외 유학을 가거나 국내 다른 대학에 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다른 대학에서는 한예종의 독식(獨食) 현상이 가속화할 것이라고 우려하는데

“학생 숫자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인문학이나 예술 분야의 위기감 고조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우리 학교 역시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우선 지역 소재 국공립 대학들과 학점 교류·교환 학생 제도를 도입하고 장기적으로는 협동 과정 운영, 교수와 강사 교류도 추진해야 한다. 예술 교육이 위기라면 모든 학교가 공동 대응해야지 각개격파당해서는 안 된다.”

☞김대진

1962년 서울 출생. 대학 입학 이전인 1979년부터 국내 콩쿠르를 석권하면서 일찍부터 영재 피아니스트로 주목받았다. 1981년 입학한 서울대 음대 동기가 소프라노 조수미·작곡가 진은숙이다. 대학 재학 중에 도미(渡美), 미 줄리아드 음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 맨해튼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9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손열음(차이콥스키·반 클라이번 콩쿠르 2위), 김선욱(리즈 콩쿠르 1위), 문지영·박재홍(부조니 콩쿠르 1위) 등 수많은 스타 피아니스트를 길러냈다. 별명은 ‘콩쿠르 우승 제조기’ ‘피아노의 명조련사’ ‘악마 쌤(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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