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인사이트] 백남준, 무하.. 예술가에게 나라란 무엇인가

김영애 '나는 미술관에 간다' 저자 2022. 10. 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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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와 백남준은 각각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활동했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고국을 위해 발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무하는 튀르크족에 맞선 슬라브인들의 치열한 방어전(왼쪽 사진)을 화폭에 담는 등 민족혼을 담은 작품을 여러 점 그려 대중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했다. 복원 작업을 마치고 최근 재가동된 백남준의 ‘다다익선’(오른쪽 사진)은 1003개의 TV로 구성돼 있는데 10월 3일 개천절을 나타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깃들어 있다. /알폰스 무하 재단·뉴시스

개천절이 되면 생각나는 작가가 있다. 바로 백남준(1932-2006)이다. 1988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된 ‘다다익선’의 TV 숫자가 모두 1003개인데 그 이유가 10월 3일 개천절에 맞추어 작가가 일부러 선택한 숫자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이 작품은 기계 노후화로 가동을 중지했다가 최근 4년간의 복원을 마치고 다시 시험 운영을 시작했다. 제작 당시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염원, 물질적 정신적 헌신이 들어갔으니 작품 하나 설치하고 되살리는 일이 한 나라를 세우는 일과 다를 바가 없다. 백남준은 ‘애국하면 망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나 1003개의 숫자를 새길 때 그의 뿌리가 한국임을 천명하고 그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한국으로까지 연결하려는 계산이 없었을 리 없다. 내가 세계적인 작가가 되면 그것이 곧 애국이라는 부연 설명 그대로다.

사실 예술가와 애국심이라는 연결은 잘 어울리지 않게 느껴진다. 국가에 충성하는 예술은 순수한 예술이 될 수 없고, 또한 예술가라면 의당 이 명제에 반항하며 ‘국가란 무엇인가?’ ‘애국이란 무엇인가?’ 하는, 김영민 서울대 교수가 던진 ‘추석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하는 존재여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 맥락의 국가라기보다는 작가의 개성과 정체성의 뿌리인 고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고국은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거대한 창작의 원천임이 분명하다. 백남준이 한국에 살았던 시간도 고작 태어나서 18세가 될 때까지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작품에는 지속적으로 한국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한국 미술이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중재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93년, 하마터면 일본으로 갈 뻔했던 휘트니 비엔날레의 해외 첫 전시를 한국으로 유치하기 위해 사비를 털어 후원한 것이 대표적이다. 1995년에는 광주 비엔날레의 출범에도 기여하였으며, 베네치아 비엔날레 자르니디에 마지막 남은 한 채의 건물이 한국관이 될 수 있도록 세계 미술계 인사들을 설득하는 데도 성공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대가의 영향력과 한국은 장차 남북통일이 될 의미 있는 나라라는 호소력이 더해진 결과다. 1996년 안타깝게도 뇌졸중으로 쓰러지지만 않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일을 더 해내었을까?

세계적 예술가가 자신의 성공을 바탕으로 고국에 기여한 또 다른 작가로 알퐁스 무하(1860-1939)를 소개하고 싶다. 지금도 전시회가 끊이지 않는 구불구불한 선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많이 그린 아르누보의 대가다. 20세기 초 파리에서 만국박람회의 포스터를 도맡았으며 파리, 빈, 뉴욕 등 세계 곳곳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오스트리아의 기사 칭호와 프랑스 명예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오스트리아도 프랑스 사람도 아닌 모라비아 대공국 출신으로, 슬라브 민족의 영혼을 위한 대역사화를 그리겠다는 평생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프라하로 돌아와 큰 성에 틀어박혀 18년의 세월을 보냈다. 각 6x8m에 달하는 대작 20여 점을 완성하여 프라하시에 기증했다. 작품에 전념하는 긴 세월 동안 모든 상업적인 제안을 거부했지만 예외가 있었다면 바로 국가를 위한 무료 봉사였다. 오스트리아 제국 치하에 있던 모라비아 대공국이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편입되며 새로운 국가로 탄생한 것이다. 그는 무상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우표, 지폐, 각종 정부 문서와 양식, 경찰 제복 등을 디자인하며 국가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39년 이 땅은 다시 독일 제국의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작가는 애국 활동이 빌미가 되어 독일 정부의 심문을 받은 후 건강을 잃고 1939년 숨을 거뒀다.

이 사실이 여태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채 그저 아름다운 삽화를 그린 작가로만 알려지고 만 건 히틀러에게 몰수될까 봐 역사화 대작들을 둘둘 말아 숨기고, 체코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며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다행히 1960년대에 들어 조금씩 공개되기 시작했으며, 2012년 프라하시에서 이를 한자리에 모아 연 전시회는 큰 반향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적합한 공간이 없는 프라하시는 전시가 끝난 후 모라프스키시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이 작품을 50여 년간 보관해 온 시는 유족과 함께 작품의 프라하시 이전을 반대하고 있다. 프라하시는 새로운 공간 건립을 위한 기금을 모으고 있지만 기대만큼 진척되지 않는 모양이다. 민족의 통합과 영광을 바랐을 작가의 바람과 달리 또 다른 분쟁을 낳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백남준 작품의 운명도 그닥 유쾌한 상황은 아니다. 살아생전 그가 누렸던 명성과 미술사적 가치에 비해 작품 값은 저평가되어 있고, 작품의 복원과 유지가 계속 문제다.

이는 후손의 노력에 의해 재평가받는 작가의 사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대표적인 것이 반 고흐다. 살아 생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유족의 오랜 노력은 그를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작가로 거듭나게 했다. 또 다른 예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들 만하다. 별다른 유언을 남기지 않아 그의 작품 대부분이 프랑스에 남아있지만, 게르니카는 반드시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평소 자주 했다고 한다. 작가의 뜻에 따라 이 작품은 마드리드 소피아 미술관에서 국보급 대접을 받고 있다. 이상의 결과는 다시 그 국민들의 이득으로 이어진다. 반 고흐의 경우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미술관을 건립하여 단일 작가의 미술관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 수를 기록하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고, 피카소는 자칫 잊힐 뻔한 스페인 변방의 사건을 세계인이 알아야 할 역사적 상식으로 만든 셈이다.

개인기를 활용하여 국가의 발전을 기원했던 작가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이제 세계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성장한 우리도 이제 놓친 것은 없는지를 돌아볼 때다. 국수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겠지만, 세계인의 관심이 한국을 향하고 있는 시기인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는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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