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을 넘은 은빛 바람, 삶과 죽음을 묻다
은빛 산들바람이 언덕을 넘는다. 누워있는 갈색 풀 사이로 고고하게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꽃 한 송이. 은과 백동 등으로 바람의 질감을 표현한 ‘바람에 기대어’(1987)다.
이제는 부녀모두 고인이 됐지만, 공예가 유리지(1945~2013)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유영국(1916~2002)의 딸이다. 가장 인공적인 행위인 공예를 통해 자연의 가장 서정적인 모습을 그렸다. 경북 울진 태생인 작가는 차가운 금속으로 시정(詩情)을 지어냈다. 자연과 인간,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심이었다. 생전 “삶의 아름다운 축약인 죽음은 삶을 직시하는 데 가장 적합한 언어”라고 말한 작가는 공예가 삶의 아름다운 마감에 기여할 수 있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은(銀)으로 땅과 바람을 형상화한 조형물 외에도, 부친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생명의 순환을 표현한 장례용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유골함인 ‘골호-삼족오’(2002)와 생명의 근원인 물로 생(生)과 사(死)의 순환을 나타낸 ‘유수(流水)’(2010)가 대표적이다.
지난 27일 서울공예박물관에서 막을 올린 ‘사유(思惟)하는 공예가 유리지’전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 327점이 모여 있다. 전시장 입구엔 유리지의 사유 흔적이 남아있는 우면동 작업실이 구현되어 있다. 그 흔적을 시간 순서에 따라 4부로 나눠 담은 전시엔 1970년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을 때인 활동 초기부터 2004년 금속공예 전문 미술관 ‘치우금속공예관’을 설립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시기까지의 작품들이 담겨 있다. “나는 내 작품이 현대의 생활 공간에서 존재할 수 있는 의식(儀式)을 위한 소도구가 되기를 원한다.” 튤립 문양으로 수놓은 다기(茶器)세트와 일렁이는 파도를 형상화한 은색 목걸이 위 벽면에 작가의 소망이 적혀 있다.
박물관은 유족이 작품과 함께 기부한 6억원으로 우수 공예 작가를 선정·시상하는 ‘서울시 공예상’ 제정을 추진한다. 전시 기간은 11월 27일까지. 관람료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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