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유럽의 위험한 여자들

이향휘 2022. 10. 3.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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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2주차 트러스 英총리
세계 금융시장 혼돈 내몰아
혐오 조장 '여자 무솔리니'
이탈리아 멜로니도 변수
지금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를 꼽으라면 이 둘일 것이다.

'제2의 대처'로 기대를 모았던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47)와 '여자 무솔리니'라는 수식어를 달고 이탈리아 최초 여성 총리로 등극할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형제들 대표(45)다. 공교롭게도 둘 다 갱년기 여성들이다.

트러스 총리는 취임한 지 2주 만에 세계 금융시장에 '감세'라는 핵폭탄을 떨어트렸다. 40년 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씨름하는 상황에서 돈 풀기 정책을 내놓자 영국의 재정적자 우려가 커지며 파운드화 가치를 단번에 37년 만에 최저치로 끌어내렸다. 30년물 국채금리는 한때 5%를 넘었다. 영국이 '유럽의 병자'들인 이탈리아, 그리스보다 더 높은 이자를 물고 국채를 발행해야 할 처지로 전락했다.

부랴부랴 650억파운드(약 100조원) 규모의 국채 매입을 약속하며 시장에 개입했지만 오히려 인플레이션 불씨만 더 키우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을 자아내고 있다. 파운드화는 기축통화국으로 대영제국의 영광을 상징했지만 이제는 몰락의 아이콘이 됐다. 오죽하면 자국 경제지인 파이낸셜타임스(FT)마저 "파운드화 폭락 사태는 영국 정부가 자초한 금융위기이며 신뢰의 위기"라고 꼬집었을까.

이르면 다음달 총리직에 취임하는 멜로니 대표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파시즘의 창시자 베니토 무솔리니 이후 100년 만에 등장한 극우 리더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난민, 동성애, 낙태에 모두 격렬하게 반대하는 그는 강한 이탈리아를 표방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독일과 프랑스 주도의 유럽연합(EU) 질서에 맞서겠다는 것이다. 집권 연정에는 세계 경제 '빌런'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추종하는 세력도 상당수다. 초인플레이션 상황에서 러시아처럼 권위주의 국가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특히나 멜로니 대표가 난민과 흑인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며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점은 그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멜로니 대표는 지난 8월 서아프리카 기니에서 망명을 신청한 23세 흑인 남성이 이탈리아 북부 피아첸차에서 55세 백인 여성을 성폭행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을 의도적으로 트위터에 올린 뒤 파문이 일자 삭제했다. 아직 취임 전이어서 어떤 정책을 내놓을지 모르지만 그 역시 대책 없는 감세를 비롯한 포퓰리즘 정책을 내놓을 공산이 크다.

FT에 따르면 영국의 불행을 지켜보는 유럽 다른 나라들은 독일어 '샤덴프로이데'를 외치고 있다고 한다. '고것 참 쌤통'이라는 느낌이 배어 있는 말이다. 샤덴(고통)과 프로이데(즐거움)의 합성어로 타인의 고통에서 얻는 은밀한 즐거움을 뜻한다. 혼자 잘살겠다며 EU와 결별한 지 2년 만에 영국이 추락하는 것이 고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영국의 고통은, 이탈리아의 잠재적 불행은 우리 모두가 짊어질 고통으로 치환되고 있다. 한 국가가 민폐를 끼치면 다른 나라도 덤터기를 뒤집어쓰는 형국이다. 금요일 밤 파운드화 폭락이 그 다음주 월요일 코스피와 코스닥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 한 예다. 재정적자가 심각하고 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 어설픈 감세 정책은 중앙은행의 긴축통화 기조와 엇박자를 내며 투자자들을 혼돈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전 세계가 물 샐 틈 없는 공조를 펼쳐 인플레이션이라는 거대한 불길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내 코가 석 자'인 상황에서 분열만 가속화하고 있다. 위기를 타개할 만한 리더십도 보이지 않는다.

이 상시적인 불안과 불확실성이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일 수도 있다는 섬뜩한 생각이 든다. 유럽에서 등장한 가장 위험한 두 여자가 새삼 우리가 직면한 냉혹한 현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향휘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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