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 여성 임신중단권 인정"..인도 대법원의 '세기의 판결'
신체 자기 결정권에 근거
여성의 성적 자율성 확인
‘부부간 강간’ 개념도 인정
가부장적 문화서 ‘진일보’
인도 대법원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인도 여성 인권 역사에 기념비로 남을 판결을 내렸다.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여성이 임신중단을 할 동등한 권리가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동안 인도 대법원은 성폭력 피해자나 기혼여성에게만 임신중단을 허용해왔다. 전문가들은 여성 인권이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곳 중 하나인 인도에서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BBC에 따르면 해당 판결은 임신중절 수술을 받길 원하는 25세 미혼 여성의 청원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임신 22주차였던 이 여성은 파트너와 합의된 관계하에 임신했지만, 파트너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자신과의 결혼을 없던 일로 했다며 임신중단을 원한다고 설명했다. 인도 사회 분위기상 혼외 자녀를 갖게 되면 “사회적 낙인과 괴롭힘”에 노출될 게 분명한 데다 직업이 없어 아이를 키울 경제적 여유도 없다고 주장했다.
인도에서 임신중단은 불법이 아니다. 앞서 인도는 1971년 ‘의학적 임신중단법’을 도입하면서 임신중단을 합법화했다. 다만 임신중단은 일부 여성에게, 심지어 임신 20주차까지만 허용되는 매우 제한된 권리였다.
인도 정부는 지난해 법을 개정하면서 임신중단 가능 시기를 임신 20주에서 24주로 늘렸지만, 미혼 여성의 임신중단권은 법에 명시되지 않았다. 이번에 청원을 제기한 여성은 ‘미혼’이고 ‘합의된 관계’하에 임신했으므로 임신중단권을 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인도 대법원은 “여성의 결혼 지위가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할 권리를 박탈할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관들은 임신을 유지하거나 종료하기로 한 결정은 여성의 신체 자기 결정권과 본인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확실히 뿌리를 두고” 있으며, 원치 않는 임신은 “교육, 직장생활, 정신적 안녕에 영향을 미쳐” 해당 여성의 삶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번 판결은 그간 인도 사회에서 터부시돼왔던 미혼 여성들의 성적 자율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인도에서는 혼전 성관계를 갖는 여성들이 공공연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일부 지역에선 신부들이 결혼식 날 밤에 ‘처녀성 검사’를 받아야 할 정도로 가부장적인 시선이 만연하다. 하지만 대법관들은 이날 지난 수년간 인도 사회가 크게 변했기 때문에 “제한된 가부장적인 원칙”에 입각해 어떤 종류의 성관계를 허용할지를 판단할 수 없다며 동거 관계, 혼전 성관계 등을 더는 “범죄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날 ‘부부간 강간’ 개념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인도에서 부부간 강간은 아직 범죄로 인정되지 않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이 부부간 강간 면책특권을 법적으로 없애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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