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으로서의 웃음 ② [백승주의 언어의 서식지]
안드로메다 은하는 우리 은하에서 250만 광년 떨어져 있다. 나는 지구에서 강의 중이다. 그렇지만 학생들의 영혼은 지구를 떠나 안드로메다를 헤매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설명을 이어나간다. "언어라고 하면 우리들은 무심코 '문장'이나 '문법'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입말 즉 구어의 존재를 잊어버립니다. 글말 즉 문어만을 언어라고 착각하지요." 여기서 잠깐, 나는 말을 멈추고 학생들을 바라본다. 그러고 천천히 다음 설명을 이어나간다.
"여러분 문어 아시죠? 오징어 말고 문어. 문어가 오징어보다 비싸죠."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면 수업을 듣는 이들의 얼굴이 일제히 나를 향한다. 대부분 썰렁한 농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다. 아주 가끔 웃는 학생도 있다. 내가 코미디언이었다면 대실패였겠지만, 나는 만족스럽다. 나의 목적은 학생들의 영혼을 250만 광년 떨어진 우주를 가로질러 지구로 귀환시키는 것이었으니.
내가 학생들을 250만 광년이나 떨어진 우주에서 순식간에 지구로 불러들인 비법은 다음과 같다. 내가 언어나 문장, 문법, 구어, 문어 등을 이야기할 때 학생들은 자동적으로 이와 관련된 지식들(주어, 술어, 동사, 명사…)로 구성된 스키마라고 불리는 마음속 모형을 떠올린다. 그러다 갑자기 오징어라는 어휘가 등장하면 번쩍! 다른 스키마가 활성화된다. 마음속에 생성된 두 세계가 충돌한다. 이런 긴장 관계가 250만 광년 떨어진 학생들의 영혼을 순식간에 다시 지구로 소환한다.
사실 학생들이 먼 우주에서 강의실로 다시 돌아온 이유는 내 썰렁한 농담이 학생들에게 같이 놀자고 하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유머는 사회적 놀이다. 이 사회적 놀이는 즐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긴장을 완화시키며, 인지적 유연성을 제공해 원활하게 문제를 해결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사회적 유대감을 공고히 한다.
사회적 놀이로서의 유머는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생존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놀이는 힘센 사람이 일방적으로 이겨 먹는 놀이가 아니다. 그런 놀이는 놀이로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나 안 놀아!) 유머는 남을 이겨 먹어서 기쁘다고 뽐내는 장치가 아니다. 이는 웃음을 설명하는 가설 중 하나인 '우월감 이론'의 설득력을 약화시킨다. 사회학자 멀케이(Mulkay)에 의하면 오히려 유머는 실제 의사소통 상황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의견 충돌, 불일치, 모순에 대처하게 하는 장치다.
대면 의사소통에서 유머는 스위스 군용 칼처럼 다양한 수리 기능을 수행한다. 이 스위스 군용 칼은 의사소통이 와해되지 않도록 소통 과정에서 생겨나는 균열들을 부지런히 수선한다. 그 기능이 너무 다양해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조롱하기가 있다. 유머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소통 상황에서 자신과 상대방이 가진 체면(face, 이상적인 자아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롱하기는 타인을 공격함으로써 상대방의 체면을 위협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일상의 질서가 전복되는 카니발의 시공간과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대면 의사소통 상황에서 조롱하기가 진정한 공격 행위로 수행되는 경우는 드물다. 조롱하기가 진짜 공격이 될 때 현실은 너 죽고 나는 사는 막장드라마가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 안에서 조롱하기 유머는 서로의 유대감을 공고히 하는 장치로 이용된다.
그런데 조롱하기 유머가 대면 의사소통 상황이 아닌 경우, 다시 말해 상호작용할 '얼굴'이 증발한 곳에서 사용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 조롱하기 유머가 '입말'의 영역에서 '글말'의 영역으로 사용되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글말의 영역에서 조롱하기 유머는 그 유머를 담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조롱하기는 전시하고 복제하고 유통하고 구입할 수 있는 상품으로 변한다. 그리고 여기서 조롱하기 유머는 의사소통의 과정을 수리하는 스위스 군용 칼이 아니라, 표적을 마구 찌르는 그냥 칼이 된다.
18세기 혁명 전 프랑스의 상황이 이랬다. 당시 프랑스는 가히 조롱의 시대라고 할 만했다. 조롱하기 유머가 담긴 용기는 포르노그래피, SF, 중상비방문과 같은 '저급한 책'들이었다. 이 책들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마리 앙투와네트의 성적 방종과 루이 16세의 성적 무능을 조롱하는 책들이 인기를 끌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이런 공격적인 웃음은 전염성이 강하다. 인쇄 산업의 발달로 인해 생겨난 글말의 영역은 프랑스 민중들에게 카니발의 공간을 열어주었고, 그 공간 안에서 프랑스 민중은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구체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로버트 단턴은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 혁명을 이끌어낸 것은 계몽사상가들의 철학책들이 아닌 저급한 책들이었다고.
내가 18세기 프랑스에 살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철학책 보기를 돌같이 하고, 저급한 베스트셀러만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낄낄거리며 남들에게 조롱하기 유머를 열심히 전파했을 것이다. 아니다. 나는 지금도 그러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대통령의 실언에 대한 황당한 대응을 패러디한 '조 휘날리며', '태극기 휘바이든'과 같은 패러디물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국회 새끼줄 승인 안 하고 휘날리면 쪽파여서 어떡하냐?'라는 패러디 문구를 SNS에 올릴까 말까 망설였다.
익살맞은 표현, 조롱, 음탕함, 무질서, 비하하기, 외설적 표현, 폭력성, 풍자, 해학, 엽기, 무엇보다 웃음. 이런 표현들이 묘사하는 것은? 사이버 공간이라고 답하는 이도 있겠지만, 이 표현들은 카니발을 묘사하는 말들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현대의 인터넷 공간에서는 매일 카니발이 벌어진다. 카니발이 일상의 질서를 전도시키고 해학과 풍자를 통해 기존의 모든 위계적 서열, 규범, 권력, 체제에 저항한다고 한 바흐친의 해석을 들으면 당신도 납득할 것이다. 카니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가면을 쓰고 기존의 자아를 버려야 하지만, 인터넷 공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얼굴이 필요없는 그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현실을 평가하고, 조롱하며 비웃는다.
하지만 카니발이 체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가진다는 바흐친의 생각은 절반만 맞는 것 같다. 단식 농성을 하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폭식 투쟁'을 벌이고,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까지도 조롱거리로 만들며 끔찍한 혐오와 웃음을 뒤섞는 일베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체제에 철저하게 순응하기 위해 이런 일들을 벌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의 행동을 '보통 일베들의 시대'의 저자 김학준은 '웃음의 주목 경제'로 설명한다. 김학준의 통찰에 따르면 웃기는 능력만으로 평가받고, 그 웃기는 능력이 자본이 되는 웃음의 주목 경제가 일베를 움직이는 힘이다. 이런 사이버 공간에서 웃길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려는 과도한 경쟁이 지금의 일베를 낳았다는 것이다.
김학준은 우월감 이론을 바탕으로 일베의 웃음을 바라본다. 나는 조금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다. 활성화된 두 개의 스키마를 충돌시키는 유머의 구조는 인지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두 스키마의 거리가 적절해서 그 쾌감이 극대화될 때, 우리는 사태의 핵심을 짚어냈다는 또 다른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성공한 유머는 즉각적인 통찰의 느낌을 준다. 즉 은폐된 진실에 단번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유머는 제공한다. 물론 그 느낌이 정말로 진실을 깨달았음을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자신의 웃음이 주는 쾌감이 가짜 통찰일 수 있음을 반성적으로 들여다보는 대신, 남들이 모르는 진실을 찾았다는 느낌에 중독되면 어떻게 될까? 그는 자신을 진실의 대변자라고 여기게 되지 않을까? 진실의 대변자에게는 진실을 밝히고 알리는 게 사명이 된다. 그리고 이런 진실의 사제들에게 조롱하기를 통한 냉소는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는 진짜 '팩트'를 드러내는 신성한 도구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터넷이라는 얼굴 없는 카니발의 공간이 아닌 진짜 광장에 나타나 폭식 투쟁을 하는 일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조롱하고 냉소할 때 우리는 불합리한 세계를 전복시켰다는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 웃음은 아무것도 뒤집지 못한다. 그간 우리는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웃음을 한걸음 떨어져서 회의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대신 그 웃음이 주는 가짜 해방감을 만끽했다. 그러는 동안 일베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제 일베의 웃음은 사회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일베의 현신으로 여겨지는 젊은 정치인은 '자기 정치'를 '이죽거림'으로 대신한다.
현실을 돌아본다. 정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 조롱과 냉소만 가득하다. 세상은 정말로 망해가는데 우리는 그저 서로에게 차가운 웃음만 던지고 있다.
그 웃음, 그것이 재난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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