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와 통제, 구속의 딜레마

한겨레 2022. 10. 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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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지난달 18일 오전 서울 중구 신당역 여자화장실 들머리에 마련된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추모의 공간에서 한 시민이 피해자를 추모하며 준비해 온 꽃다발을 올려놓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세상읽기] 류영재 | 대구지방법원 판사

구속은 처벌이 아니다. 당연하다. 유무죄는 재판을 통해 가려지고, 유죄가 확정된 자만 처벌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사와 재판을 받는 동안 피고인이 구속돼 감옥에 갇힌다 한들, 그것은 죗값이 아니다. ‘나쁜 놈이니 구속돼 마땅하다’는 말은 원칙적으로 틀렸다.

그렇다면 구속은 왜 하는 걸까. 논리대로라면 재판을 통해 유무죄가 가려지기 전까지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되므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여야 한다. 피고인이 자유롭게 활보하는 동안 수사기관은 증거를 수집하고 법원은 재판하여 사안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 가해자에게 마땅한 죗값을 물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일이 이상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 법. 피고인이 자유롭게 활보하다 못해 도망가 버리면 수사와 재판은 진행될 수 없다. 피고인이 자유롭게 증거를 없애버리거나 공범과 입을 맞추면 유죄 입증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구속이 필요하다. 원칙적으로 처벌은 유죄가 확정된 뒤에 이뤄져야 하기에 수사와 재판을 받는 사람을 미리 가둬서는 안 되지만, 그 사람이 도망가거나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을 때는 ‘예외적으로’ 가둬두잔 의미다.

구속은 피고인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임시로 취하는 조치지만, 사람을 며칠에서 몇달간 가둬두다 보니 그 효과는 처벌이나 다름없다. 단 10일만 구속돼도 직장에서 해고될 위험이 높아지고 몇달간 연장되면 사회생활이나 가족관계에 위기가 닥친다. 그래서일까, 구속은 곧 유죄라는 인식이 생겼다. 수사기관은 구속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구속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과 생활상 불이익을 약점 삼아 피의자를 압박하거나 범죄자라는 사회적 낙인을 찍어 자백을 유도했다. 법원도 제대로 통제하지 않았다. 한때는 검찰이 청구하는 대로 구속영장을 죄 발부했다. 나쁜 놈은 구속해서 반성시켜야 한단 말이 농반진반 나오기도 했다. 수사 대상이 되면 곧 구속되는 나라에서 수사와 기소를 관장하는 국가는 국민보다 셌다.

구속에 대한 사법통제 필요성이 요구되면서 법원 내에서도 반성이 일었다. 구속사유(도주와 증거인멸 우려)가 있는지 실질적으로 판단하기 시작했고, 유죄라도 벌금형에 그칠 사안에서는 구속영장 발부를 절제했다. 구속이 원래 제도 취지대로 꼭 필요할 때에만 예외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인식이 판사들 사이에서 확산했다. 시민은 누구나 수사 대상이 될 수 있고 구속은 형사처벌에 관한 가장 강력한 공권력의 행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방향은 옳다.

문제는 기존의 구속제도로 막지 못하는 위험이다. 최근 벌어진 서울지하철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예처럼 수사와 재판 기간에 범죄 피해자가 피고인으로부터 심각한 위해를 당하는 일이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다. 반복되는 비극을 막기 위해 구속사유에 ‘피해자 위해 우려’를 추가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피해자가 보복을 당하거나 더 큰 위해를 입도록 방치하는 것은, 피해자가 당한 범죄에 대한 합당한 책임을 가해자에게 지우는 형사사법의 본질에 반한다. 따라서 피해자를 보호할 방안의 하나로서 구속 제도를 검토해 보자는 데 동의한다.

다만, 가장 강한 공권력의 행사인 구속이 통제 대상이란 점은 항상 인식해야 한다. 구속사유에 피해자 위해 우려를 추가하면 지금 문제가 되는 스토킹 범죄나 기타 상습성이 인정되는 범죄 외에도 피해자가 있는 모든 범죄에서 구속이 무분별하게 남용될 위험이 생긴다. 영장 발부 여부를 결정하는 판사로서는 피해자가 재범당할 위험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안이라면 구속영장을 기각하기가 껄끄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속사유에 피해자 위해 우려를 추가하더라도 구속 남용을 막기 위한 장치는 필수적이다.

영장실질심사에서의 조건부 석방제도 도입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구속영장을 발부함과 동시에 실시간 위치추적, 피해자 접근금지 및 보호관찰의 조건을 달아 피고인을 석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조건을 어기면 즉시 구금된다. 이 제도를 도입하면, 판사는 구속영장 발부 단계에서 구속 또는 불구속밖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고, 구속이란 강한 공권력 행사를 통제함과 동시에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다양하고 실효적인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게 된다. 피해자 보호와 공권력 통제, 형사사법에 있어 어느 하나도 포기돼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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