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현의 '몫'] 침수되지 않을 집 구하기

한겨레 2022. 10. 2. 17: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조기현의 ‘몫’]

최근 폭우에 따른 침수로 반지하 집에서 가족이 숨지는 등 주거 취약층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을 확대 공급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하지만, 지난 8월30일 정부가 밝힌 2023년도 예산안에 공공임대주택 관련 예산을 5조6천억원 이상 삭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이날 비가 내리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 주택가 모습.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조기현 | 작가

문 열고 들어서는 집마다 도배와 장판이 새로 돼 있었다. 싱크대나 화장실 문틀이 새것인 곳도 있었다. 공인중개사와 함께 동네 곳곳 빈집들을 둘러보니 안심이 됐다. 약속한 퇴거 날짜는 다가오는데 집을 구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기 때문이다. ‘아, 아직 서울에 내 보증금과 월세로도 무언가 새것으로 교체된 집에 살 수 있구나!’ 싶었다.

둘러본 집들은 대부분 1층 같은 반지하이거나 반지하 같은 반지하이거나 지하 같은 반지하였다. 집 상태에 관한 여러 물음에도 권태로운 티 하나 없이 성실하게 대답해주는 공인중개사에게도 신뢰가 갔다. 공인중개사에 대한 신뢰가 커질 무렵, 말없이 집을 함께 둘러보던 동생이 팔꿈치로 나를 툭툭 치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침수된 집인 거 같아.”

아차 싶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갈 곳이 다 새것일 리 없지. 여기는 지난 폭우 때 시간당 강수량이 가장 많았던 서울시 동작구. 당시 반지하에 살던 주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파출소로 대피했고, 침수된 집에 남아 있던 가전제품들은 집 밖으로 나와 골목에 둥둥 떠다녔다. 그렇게 침수됐다던 집들 근처의 집들을 둘러봤으니 침수가 안 됐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둘러본 집들 가운데 내부가 가장 낡은 집을 계약했다. 새것 하나 보이지 않고 위치도 언덕배기인데 침수 걱정은 없어 보였다.

계약한 집을 다시 둘러보는데, 동생이 피식하며 창틀을 가리켰다. 나무로 된 창틀을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거 아니냐는 동생의 농담에 나는 창문에 햇볕 잘 들어오는 게 어디냐고 맞받아치며 웃었다. 그런 대화를 주고받으니 나무 창틀에서 새시 창틀로 바뀌는 게 무슨 계층 상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방범과 단열이 조금 더 확보되니 나은 생활환경인 것만은 분명했다. 문득 다음으로 이사 가는 집은 새시 창틀이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난 몇달 사람들이 다 나간 재개발지역에서 지냈다. 집주인이 마지막까지 나가지 않고 있었기에 나도 세입자로 계속 살 수 있었다. 9년 전 이사 올 때는 아버지하고 강아지랑 함께 왔다. 이제 아버지는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이 집에는 나와 강아지만 남았다. 2인 가구에서 1인 가구로 바뀌는 동안 무수한 돌봄 위기가 있었다. 집에서 벌어졌던 위기의 순간들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사람은 집주인이었다.

집주인은 그런 나를 위해 몇년간 월세를 올리지 않고 있다고, 수도요금도 늘 2000원씩 깎아준다고 강조했다. 젊은 사람이 아버지를 돌보면서 고생하며 살아서 그런 거라고 했다. 반지하, 고시원, 옥탑방에 안 사는 걸 고마워하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런 베풂의 태도에 나는 모멸감을 느꼈다. 가난한 사람이 으레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강제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정말이지 집에 머무는 시간도, 다시 머물 집을 찾아다니는 시간도 끊임없이 계급에 관해 생각하게 했다.

나는 침수되지 않을 집을 구했고 이전 집주인과도 작별했지만, 그렇다고 다행스럽지는 않다. 여전히 침수 위험이 있는 집에 사는 이들의 근심을 생각해본다. 열악한 집에 사는 이들이 견디고 있을지 모를 모멸의 무게를 떠올려본다. 지금 집보다도 더 아래로 내려갈지 모른다는 불안을 상기시킨다.

정부는 내년도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역대 최대로 삭감했다. 주거가 취약한 이들의 주거를 보장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삭감이다. 세입자들의 마음은 더 무거워지고 깊게 침잠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격차에 주목하라’(Mind the Gap), 세계 주거의 날의 슬로건이다. 매년 10월 첫째 월요일이 유엔이 지정한 세계 주거의 날로, 올해는 오늘이다. 틈새를 신경 쓰라는 슬로건은 점점 벌어지는 불평등에 대한 경고다. 틈새를 신경 쓰기는커녕 벌리려는 정부가 새겨야 할 말이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