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대법원이 미혼 여성의 임신중단권 인정한 이유는?
“미혼 여성도 기혼여성과 마찬가지로 임신 24주 차까지 중절 수술을 받을 수 있다.”
- 인도 대법원, 2022.9.29
인도 대법원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인도 여성 인권 역사에 기념비로 남을 판결을 내렸다.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여성이 임신 중단을 할 동등한 권리가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동안 인도 대법원은 성폭력 피해자나 기혼여성에게만 임신 중단을 허용해왔다. 전문가들은 여성 인권이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곳 중 하나인 인도에서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이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25세 미혼 여성의 청원에 응답한 인도 대법원
BBC에 따르면 해당 판결은 임신 중절 수술을 받길 원하는 25세 미혼 여성의 청원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임신 22주차였던 이 여성은 파트너와 합의된 관계 하에 임신했지만, 파트너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자신과의 결혼을 없던 일로 했다며 임신 중단을 원한다고 설명했다. 인도 사회 분위기상 혼외 자녀를 갖게 되면 “사회적 낙인과 괴롭힘”에 노출될 게 분명하나는 것이었다. 그는 또 부유한 가정 출신도 아니고 직업이 없어 아이를 키울 경제적 여유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 여성은 임신 중절 수술을 받기 위해 델리 고등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으나 기각되자 지난 7월 인도 대법원의 문을 두드렸다.
인도에서 임신 중단은 불법이 아니다. 앞서 인도는 1971년 ‘의학적 임신 중단법’을 도입하면서 임신 중단을 합법화했다. 다만 임신 중단은 일부 여성에게, 심지어 임신 20주차까지만 허용되는 매우 제한된 권리였다. 인도 당국은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으로 여아 낙태가 비일비재하게 이뤄지자 성비 불균형 문제를 우려해 기혼·이혼 여성이나 과부, 장애인, 미성년자 또는 강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에만 임신 중단을 허락했다. 그마저도 임신 20주차를 넘기면 보장받지 못했다. 2017년 인도 대법원은 10세 어린이의 임신 중단을 불허하는 판결을 내렸다. 성폭행 피해자인 이 어린이는 자신의 임신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으나 임신한 지 32주차라는 이유로 임신 중단을 허가받지 못했다.
인도 정부는 지난해 법을 개정하면서 임신 중단 가능 시기를 임신 20주에서 24주로 늘렸지만, 미혼 여성의 임신 중단권은 법에 명시되지 않았다. 이번에 청원을 제기한 여성은 ‘미혼’이고 ‘합의된 관계’ 하에 임신했으므로 임신 중단권을 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인도 대법원은 “여성의 결혼 지위가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할 권리를 박탈할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관들은 임신을 유지하거나 종료하기로 한 결정은 여성의 신체 자기 결정권과 본인의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확실히 뿌리를 두고” 있으며, 원치 않는 임신은 “교육, 직장생활, 정신적 안녕에 영향을 미쳐” 해당 여성의 삶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았다.
성적 자율성·부부간 강간 개념도 인정…“법은 사회와 함께 진보해야”
이번 판결은 그간 인도 사회에서 터부시돼왔던 미혼 여성들의 성적 자율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인도에서는 혼전 성관계를 갖는 여성들이 공공연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일부 지역에선 신부들이 결혼식 날 밤에 ‘처녀성 검사’를 받아야 할 정도로 가부장적인 시선이 만연할 정도다. 하지만 대법관들은 이날 지난 수년간 인도 사회가 크게 변했기 때문에 “제한된 가부장적인 원칙”에 입각해 어떤 종류의 성관계를 허용할지를 판단할 수 없다며 동거 관계, 혼전 성관계 등을 더는 “범죄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날 ‘부부간 강간’ 개념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인도에서 부부간 강간은 아직 범죄로 인정되지 않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이 부부간 강간 면책특권을 법적으로 없애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법정 조언자로서 부부간 강간 사건에 대해 델리 고등법원을 보좌해 온 레베카 존 선임 변호사는 “법의 진화에서 한 번에 일어나는 일은 없다. 한 걸음을 내디디고 나서 뒤로 밀려나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오늘 대법원의 판결은 작지만 확실한 진전이었다”고 현지 매체 인디안익스프레스에 말했다.
https://www.khan.co.kr/world/asia-australia/article/202209301526001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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