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이 접속할 땐 그녀에게 감사하세요 [구은서의 요즘 책방]

구은서 입력 2022. 10. 2. 10:31 수정 2022. 10. 2.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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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과학 등 여성 활동 금기시되던 영역
첫걸음 내딛은 여성 100명 이야기 모아
<그녀가 최초였다> 최근 국내 출간
와이파이 등 무선통신기술의 기본 원리를 최초로 고안한 헤디 라마르.


"출석번호 1번부터 발표해보자." 학교 다닐 땐 선생님의 이런 말이 무서웠습니다. 처음이 된다는 건 설레면서도 두려운 일이니까요. 참고할 사람도 없고, 끝 번호가 될수록 점차 시들해질 아이들의 관심도 첫 순서에는 너무 뜨겁고요.

조그만 교실, 금방 잊혀질 수업 발표도 이런데, 인류 역사상 처음이라면 어떨까요. 전 세계에서 내가 처음으로 하는 일, 역사를 만드는 일이라면 두려움과 설렘은 더 크겠죠.

최근 출간된 <그녀가 최초였다>는 이런 '여성 첫 OOO' '최초의 여성 OOO'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사회적 편견, 낡은 제도의 방해를 뚫고 첫걸음을 내딛은 여성 100명의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지난해 프랑스에서 세계여성의 날 100주년을 기념해 나온 책입니다. 최근 한국어로 번역돼 국내 출간됐습니다.

'여성 최초'의 역사는 여성을 향한 금기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1700년대에만 해도 여성은 여행을 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여성은 국왕의 함선에 오를 수 없었거든요. 여성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잔 바레'(1740~1807)는 그럼 어떻게 여행을 했을까요.

잔은 식물학자의 가정부로 일하다가 그와 사랑에 빠집니다. 식물 탐사 기회를 얻은 연인과 함께 길을 떠났죠. 단, 배에 오르기 위해 머리를 깎고 가슴을 꽁꽁 싸매야 했습니다. 이름도 남자처럼 바꿨죠.

다행히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시 탐험을 지휘했던 프랑스 해군 제독 부갱빌이 <세계일주여행>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선원 차림을 한 잔의 '짐승 같은' 체력 때문에 누구도 잔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훗날 정체를 들킨 뒤에도 부갱빌은 항해를 계속하게 했죠. 잔과 연인은 탐험을 지속하며 식물을 조사합니다.

잔 바레는 그렇게 역사가 됐습니다. 한참의 세월이 흘러 2012년, 유타 대학 소속 생물학자 에릭 티프는 자신이 남아메리카에서 발견한 꽃에 '솔라눔 바레티애'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잔을 기린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여성 최초'의 역사는 '인류 최초'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여성들의 도전이, 모든 도전이 그렇듯이,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거죠.

80여년 전 이미 현재의 와이파이의 기초가 발명됐다는 걸 아시나요? 이른바 '주파수 도약 확산 스펙트럼' 기술. 발명한 사람은 '헤디 라마르(1914~2000)'라는 여성이었죠. 그 무렵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불리던 할리우드 배우였습니다.

그녀는 공학 교육을 받았지만 영화 배우의 길에 접어들었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미국 미사일이 적에게 너무 자주 포착된다는 점에 분노합니다. 그래서 적을 속일 수 있는 암호 전송 체계를 고안합니다. 1942년 특허도 출원했어요.

아름다운 외모에 가려져 그녀의 과학적 성취는 뒤늦게 인정 받았습니다. 1997년에야 전자프런티어재단으로부터 상을 받았고, 세상을 떠난 뒤인 2014년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017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밤쉘'은 이 개척자의 업적을 다뤘습니다.

책에는 페미니즘 선구자들의 이야기도 담겼습니다. "여성에게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연단에 오를 권리 또한 있어야 한다." 여성의 권리 선언 제10조는 오늘날에도 널리 인용되죠. 이 선언문을 쓴 건 1784년 태어난 올랭 드 구주(본명은 마리 구즈)였습니다.

구주는 프랑스 민주주의의 상징입니다. 파리 19구에 있는 법무부 신청사는 그녀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프랑스 하원이 있는 부르봉 궁전 안에 흉상이 전시돼있습니다.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밖에 여성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해 과격 시위를 벌였던 에밀린 팽크허스트, '미투(Me too)' 운동을 처음 시작한 타라나 버크 등의 이야기도 <그녀가 최초였다>를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 에르미니 카돌(1842~1924)은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브래지어를 발명했는데, 브래지어도 이제는 코르셋 취급을 받는 걸 떠올리면 시대의 변화를 실감하게 되네요.

프랑스의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쥘리 가예는 현지에서 출간된 이 책의 추천사에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용감하게 현대화되겠다는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현대화된다는 것은 평등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 소수자와 차별받는 이들에게 희망의 버팀목이 돼주는 일이다." 아, 그녀의 남편은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입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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