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재판장님"..'반성문 감형' 위한 대필시장까지

신승민 2022. 10. 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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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는 피의자가 재판부 등에 선처를 구할 때 제출하는 반성문. 그런데 감형을 노린 의도적 작성과 이를 위한 전문 대필 시장까지 형성되며 ‘진정성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 성폭행·살인범도 써낸 '반성문'…양형에 영향 주나?

#1. 작년 12월 대낮 도심의 한 대형 마트. 20대 남성이 처음 본 10대 여학생을 화장실로 끌고 가 성폭행했다. 그는 재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그의 '죄질이 중하다'면서도 '반성하는 태도'를 양형에 고려했다고 밝혔다. 그는 75차례 반성문을 써 낸 것으로 알려졌다.

#2. 중학생 딸의 친구를 유인, 추행·살해한 뒤 사체를 유기한 '어금니 아빠' 이영학.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2018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이영학은 1심 선고 전 14차례, 2심 선고까지 26차례, 대법원 확정 판결을 앞두고 3차례 등 총 43차례 반성문을 제출했다.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는 피의자가 재판부 등에 선처를 구할 때 제출하는 '반성문'. 위 사례들처럼 반성문을 여러 차례 제출한 피의자들이 형량을 감경받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이 때문에 형사 사건을 다루는 변호사 업계에서는 피의자에게 반성문 제출을 권유하고, 온라인에는 전문 대필(代筆) 시장까지 형성돼 있는 실정입니다. 반성문이 양형(量刑·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의 정도를 정하는 것)에 영향을 주는지, 문제점은 없는지 알아봤습니다.

■ 대법원 양형 기준에 '진지한 반성' 포함…성범죄 70%에 적용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따르면, 양형 기준 가운데에는 일반 감경 인자로 '진지한 반성'이 포함돼 있습니다. 피의자가 범행을 진지하게 반성하는지 여부가 양형의 고려 대상이 된다는 것인데요.

그간 '개념이 불명확하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양형위원회는 지난 3월 '진지한 반성'에 대한 정의 규정을 신설했습니다. '범행을 인정한 구체적 경위, 피해 회복 또는 재범 방지를 위한 자발적 노력 여부 등을 조사·판단한 결과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하여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입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3월 28일 제115차 회의에서 ‘범행을 인정한 구체적 경위, 피해 회복 또는 재범 방지를 위한 자발적 노력 여부 등을 조사, 판단한 결과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하여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를 ‘진지한 반성’의 정의로 규정했다. (사진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더불어민주당 송기헌 의원실이 대법원으로부터 받은 '2019 1심 사건 중 양형 기준 적용 사건 수' 자료에 따르면, 양형 기준에 '진지한 반성'이 적용된 사건은 전체 범죄군 중 39.9%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성범죄의 경우, '진지한 반성'의 양형 기준 적용 비율이 70.9%에 이르렀습니다.

■ "반성문은 양형 시 '참고 자료'…변호인도 쓰는 것 권유"

물론 양형 기준에 이 같은 '진지한 반성'을 입증하는 조건으로 '반성문 제출'이 명문화(明文化)돼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피의자가 '반성의 뜻을 표할 수 있는' 실물 자료가 사실상 반성문 외에는 거의 없기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 반성문이 일종의 '양형 참고 자료'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한 변호사 사무실 관계자는 지난달 16일 KBS ‘시사직격’ 프로그램에서 “보통 피의자가 본인의 잘못에 대해서 반성하는 반성문을 양형 자료로 제출한다”며 “(변호인 측에서) ‘반성의 정도를 재판에서 보여주기 어려우면 반성문이라도 써서 제출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피의자에게 조언해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진 출처=KBS ‘시사직격’ 방송 갈무리)


대법원 양형위원회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재판부는 반성문과 함께 피의자의 태도, 피해자에 대한 피해 회복 노력 등을 전체적으로 파악해 '피의자가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판단한다"며 "반성문은 양형 기준에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진지한 반성'을 판단할 때 하나의 참고 자료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법원 양형연구위원을 지낸 김영미 변호사는 "사실 반성문 제출 여부는 양형과 크게 상관은 없다. 피의자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수단일 뿐"이라면서도 "재판장 입장에서는 피의자가 반성문도 안 쓰면 '진짜 반성하고 있는 게 맞는지' 약간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피의자들로서도 '안 쓰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한 변호사 사무실 관계자는 지난달 16일 KBS '시사직격' 프로그램에서 "보통 피의자가 본인의 잘못에 대해서 반성하는 반성문을 양형 자료로 제출한다"며 "(변호인 측에서) '반성의 정도를 재판에서 보여주기 어려우면 반성문이라도 써서 제출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피의자에게 조언해주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 조주빈·전주환도 쓴 반성문…대필도 성행, 믿을 수 있나

성범죄, 살인 등 강력 범죄 혐의로 세간에 충격을 준 정준영, 조주빈, 전주환(왼쪽부터) 모두 반성문을 재판부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출처=연합뉴스)


문제는 '반성문에 적힌 내용을 과연 진정한 반성의 증거로 믿을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살인·성폭력 등 중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조차 대량으로 써내는 상황에서, '반성문이 양형 참고 자료로 수용되는 게 마땅한가' 하는 비판이 나오는데요.

'신당역 살인 사건' 피의자 전주환은 스토킹 재판 과정에서 반성문을 수차례 제출하고도 끝내 피해자를 살해했습니다. 디지털 성 착취 '박사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도 재판 과정에서 100통이 넘는 반성문을 써냈지만, 징역 42년이 선고된 후 이른바 '옥중 블로그' 게시글을 통해 사법부를 비난했습니다. 집단 성폭행 등 혐의로 복역 중인 가수 정준영 역시 징역 5년을 선고받기 전까지 반성문 4통을 재판부에 제출한 바 있습니다.

박미랑 한남대 경찰학과 교수는 "반성과 용서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감정들이고 피해자가 '승인'을 해줄 때만 성립이 가능한 개념"이라며 "그런데 피의자들 반성문만 놓고 보면, '피해자에게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반성인지 아니면 '재판으로 인해 자기 삶이 무너지는 공포'에 따른 반성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대필이 성행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지금도 인터넷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성문 대필 업체들은 ▲전문가 자문 ▲신속한 작성 ▲고품질 내용 ▲저렴한 가격 등으로 홍보에 나서고 있는데요. 한 업체는 '재판부에서 대필인 것을 알 수 없도록 의뢰인의 처지와 사정에 맞게 구체적으로 작성한다'며 '기존 문안에서 몇 줄만 바꾸는 다른 업체와 차원이 다르다'는 식으로 선전하기도 했습니다.

반성문 대필 업체들은 사이트와 블로그 등에 기본 양식, 작성 요령, 감경 사례, 고객 만족도 등을 올려 놓고 선전한다. (사진 출처=KBS ‘시사직격’ 방송 갈무리)


대체적으로 대필 반성문 1통의 분량은 A4 용지 기준 2~4장 정도로, 적게는 5만 원에서 많게는 10만 원대의 가격이 매겨져 있습니다. 의뢰인이 인적 사항과 범행 사실 등을 전달하고 입금을 하면, 업체에서 확인 후 원고를 작성해 전송해주는 식입니다.

■ "피해자엔 사죄 없고 '판사님, 죄송합니다'…반성문 신빙성 따져야"

전문가들은 재판부가 피의자의 '진지한 반성'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반성문에 '공소사실에 대한 온전한 자백'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배상 계획' 등이 담겨 있는지 따져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또한 반성문과는 별개로 피의자의 진술과 태도의 변화 등을 집중 관찰해 '개전의 정'(改悛의 情, 피의자·피고인·수형자가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가짐)이 있는지 제대로 살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전문가들은 반성문과는 별개로, 재판부가 피의자의 진술과 태도의 변화 등을 집중 관찰해 ‘개전의 정’(改悛의 情, 피의자·피고인·수형자가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가짐)이 있는지 제대로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진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 서혜진 변호사는 " 정한 반성은 '피해자에게 사죄'하는 것인데, 대부분 반성문에는 '판사님, 죄송합니다. 검사님, 용서해주세요'라는 읍소가 주된 내용이다. 피해자에게는 단 한 번도 용서를 구하지 않은 피의자가 판사에게는 몇십, 몇백 장씩 반성문을 내는 경우도 있다"며 " 반성문은 법률 문서도 아니고 별도 양식도 필요 없는데, 돈벌이를 하는 대필 업체들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이렇게 '피의자 시장' '반성 시장'까지 형성될 정도라면 사법 기관에서도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김대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법무정책연구실장은 "수사받을 때는 범행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다가 증거가 나오면 그것만 인정하고,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으면 그때 겨우 자백해 반성문을 수십 장씩 부랴부랴 써내는 피의자도 있다"며 " 수사부터 재판까지 전 과정에서 피의자의 진술과 태도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해 양형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피의자는 전혀 반성하는 뜻이 없어 보이는데, 반성문에서는 정신병 등 개인의 처지를 열렬하게 호소하는 경우라면 더욱 신빙성을 따져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 검찰 "범죄자 양형 자료 '진위 여부' 확인…'합당한 처벌' 이뤄지도록 모든 노력 다할 것"

한편 검찰은 최근 반성문 등 양형 자료를 악용한 범죄자들의 이른바 '꼼수 감형' 시도에 대해 엄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대검찰청 대변인실에 따르면, 검찰은 "수사·재판을 받는 성범죄자들이 제출한 합의서, 재직·기부증명서, 진단서, 치료 확인서, 성범죄 예방 교육 이수증 등 양형 자료에 위·변조, 조작의 의심이 있는 경우 수사 단계부터 공판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반드시 위조·진위 여부를 확인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나아가 "거짓 양형 자료를 만든 행위가 문서 위·변조죄, 증거 위·변조죄 등 범죄에 해당하는 경우, 원 사건에 대한 판결이 확정된 이후라도 파생 범죄에 대해 끝까지 수사해 처벌하겠다"며 "대법원 양형 기준상 감형 인자로 볼 수 없는 성범죄자의 개인 사정을 감형 사유에서 배제하는 한편,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양형 기준의 가중 인자로 추가하도록 법원에 적극 의견을 제출하고, 양형 기준을 이탈하는 경우에는 적극 항소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검찰은 "성범죄를 포함한 모든 범죄에서 그에 합당한 처벌이 이뤄지도록 부당한 감형 자료에 대해 적극 대응하는 등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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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민 기자 (ssm0716@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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