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게임 체인저'..찬사와 야유 절묘하게 담았네

노형석 2022. 10. 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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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지난 4~9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아시아 최초로 열린 세계적인 미디어아트 대가 히토 슈타이얼의 개인전에 나왔던 2020년작 미디어아트 영상 <소셜심>의 한 장면. 노형석 기자

‘지독할 정도로’ 어렵고 심오했다. 하지만 보는 건 신나고 재미났다! 무슨 이야길 하는지는 몰라도….

뮤직비디오에나 나올 법한 요란한 전자음 속에 따발총 쏘듯 사람의 율동과 가상 세계의 요지경이 튀어나온다. 전시장 모니터의 영상물들이 쏟아내는 느낌들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런 물음을 던진 히토 슈타이얼.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그의 전시회는 이른바 대박을 쳤다. 그런가 하면 약 석달 전 개막한 전시 ‘생의 찬미’는 같은 기관이 주최했지만, ‘대박’과는 거리가 먼 결과가 나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디지털 시대 미술 담론 제시한 슈타이얼전 

지난 4월에 시작해 5개월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독일 미디어 아티스트 대가 히토 슈타이얼의 전시는 미술관 쪽에 큰 결실을 안겨줬다. 올가을 한국 미술판의 특징적 현상이 될,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들의 담론 장 초강세를 이끈 주역이 되었다. 현란한 미디어아트 영상과 게임, 뮤직비디오의 율동과 굉음이 울린 전시는 이렇게 물었다. 지금 시대 각종 재난과 전쟁, 기후의 위기 상황에서 기술은 우리를 구원할 동아줄이 될까? 디지털 문명은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가? 이에 대해 히토 슈타이얼은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답신했다.

팬데믹 상황에서 거리두기를 내세운 통제에 항의하는 시위대와 이들 진압에 나선 경찰관의 몸짓을 어둠 속에서 휘휘 조형적 선율을 그리며 난동하는 듯한 안무극 영상으로 만든 작품 <소셜심>(2020)은 코믹하면서도 강렬했다. 탐욕으로 불타는 인간 욕망이 시장과 세계를 통제 불가능 상황으로 만들어버리는 아수라장을 경제학의 거장 케인스가 불길 속에 야수로 돌변하는 영상으로 그려낸 작품 <야성적 충동>(2022) 또한 익살스럽고 격렬했다.

‘히토 슈타이얼-데이터의 바다’ 전시장의 일부 모습. 노형석 기자

성황리에 끝난 히토 슈타이얼 전은 구체적 형체가 없는 메타버스, 엔에프티(NFT·대체불가토큰) 등 비정형 콘텐츠들이 횡행하는 디지털 시대에 어떤 조형적 고민을 갖고 시대적 상황을 작품에 반영해야 하는지를 뮤직비디오나 게임 등의 형식 틀거지로 소화하면서 현대미술의 게임 체인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다.

스페인 산속에 사는 양치기 목동과 밀폐된 공간 속에서 생존 경쟁을 벌이는 21세기 디지털 노동자들, 명품 패션상품에 얽힌 디지털 신자유주의의 광기 등을 형상화하며, 그는 아트가 이제 노골적인 세계 유동자본이 주고받는 결제 통화로서 구실 하고 있다고 까발린다.

이런 시대적 경고를 발랄한 뮤직비디오의 장면처럼 연출하니, 젊은 관객들이 연일 몰려들 수밖에! 20~30대 관객들 중심으로 총 입장객수만 89만명을 기록했고 작가토크, 강연 등의 연계 행사도 모두 조기마감되는 등 반향이 컸다. 디지털 시대 시각문화의 방향과 영상물에 담긴 세상의 변화된 질서에 대한 그의 통찰은 30여년 전 이런 정보 순환의 과정을 예언자 같은 작품으로 남겼던 거장 백남준의 대작 다다익선의 재가동으로 절묘하게 갈무리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재가동되고 아카이브 전이 기념 마당으로 함께 차려지면서 미술판에 모처럼 미디어아트에 대한 공론의 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디지털 시대 시각문화의 대안으로써 미디어아트를 다시금 재론하게 만든 셈이다.

‘생의 찬미’전 들머리 공간. 도예가 신상호씨가 만든 채색 도자 조각 <토템상>(2004)이 첫 머리에 놓여 눈길을 끌었다. 뒤쪽 전시장엔 오순경 민화작가가 현대적으로 해석한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작도가 걸려있다. 노형석 기자

홀대 장르 전통 채색화 복권에 실패한 ‘생의 찬미’

한편, 국립현대미술관이 2975㎡(900여평)의 공간에 기획한 역대 최대 규모의 채색화 전시 ‘생의 찬미’는 시작부터 미술판 전문가들의 입길에 올랐다. 이 전시는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주변부 시각문화로 제도권 미술판에서는 홀대받았던 민화와 불화 같은 전통 채색화 장르를 복권시키려는 대규모 기획으로, 지난 6월에 시작해 지난달 25일 끝났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가장 중요한 전시 목적과 그 의미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뺀 채 채색화·민화·조각·수묵화·디자인·그래픽 등을 마구 섞어 넣는 모호한 기획틀 때문에, 민화나 채색화에 부정적인 제도권 화단의 비평가들로부터 집중적인 비판이 쏟아졌다.

기존의 채색화 장르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 일본 미술계가 짠 틀이고, 민화 또한 한국 미술을 사랑했던 일본 문예 비평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결정적 영향 아래 생성된 개념인데, 용어 사용과 범주에 대한 정교한 전개 과정이 빠진 채, 오늘날 미술판에서 과거 채색화 장르가 해왔던 역할을 살핀다는 의도만 강조하다 보니 전시 내용이 부실하고 혼란스럽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민화나 불화 같은 전통 채색화들이 기존 제도권 화단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고 이후 연구자들로부터도 무시당해왔던 전례를 감안하면, 소외된 전통 채색 장르 복권의 의미까지 폄훼해선 안된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생의 찬미’ 전에서 오방색을 입힌 호랑이 모양 조형물로 나와 눈길을 끈 <사방호>. 이정교 작가가 올해 만든 신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화두를 던지는 시도임에도 전시의 의미와 논란을 갈무리하는 학술적 성격의 행사를 하나도 열지 않고 막을 내린 것은 책임 방기에 가깝다는 비판도 나온다. 미술사학계의 한 중견 연구자는 “전시에 민화 작가들 작품들이 다수 출품된 데 대해 기존 학계 전문가들은 민화가 곧 채색화란 오류를 조장한다면서 공격하지만, 지난 200여년간 한국의 시각문화 역사에서 민화가 가졌던 위상에 비춰 공격이 지나치다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기획자와 윤범모 관장이 어떤 취지와 의도로 만든 것인지 입장을 내놓고 공개적으로 논의를 풀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지난 6개월 사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행보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시장에 밀려 존재감이 옅었던 국립기관이 모처럼 미술사 담론과 논쟁을 촉발시키는 멍석을 깔았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미술계 사람들이 대거리할 쟁점을 만들면서 한국 미술사 연구의 인식 틀을 바꾸기 위한 모색 국면은 어느 정도 형성된 셈이다. 올가을 국립미술관의 전시를 둘러싼 논란들을 심화시키고 공론장을 확대시킬 지속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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