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뛰어들어가 같이 돌 주울까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2022. 10. 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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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숲으로 들어가는 시간
박광수, 잉크·아크릴로 수없는 점·선
검은 드로잉, 생성·소멸 서사 담아내
색채 화면으로의 변화를 준 '돌줍기'
색색의 형상들이 표면서 밖을 향해
장재민, 회화적 언어로 '기억 더듬기'
떨림 담긴 붓질 시각·촉각 경험케 해
'저수지 상류' 후드득 빗소리 들리는 듯

◆박광수, 숲으로 들어가는 그림

박광수(1984∼)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했다. 이후 동 대학원 조형예술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첫 단체전 참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학고재, 두산갤러리, 금호미술관, 신한갤러리, 인사미술공간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이응노의 집, 두산갤러리, 금호미술관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제5회 종근당 예술지상, 제7회 두산연강예술상을 받았다.

박광수는 작업 초기 잉크, 먹, 아크릴 등을 사용해 점과 선을 중첩하는 검은 드로잉으로 이름을 알렸다. 직접 제작한 스펀지 붓에 검은색을 묻히고 화면 위에 미끄러지듯 그 흔적을 남긴 작품은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제시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수없이 그어지고 찍힌 선과 점은 화면 속에서 궤도를 형성하며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우주를 만들었다.
박광수, ‘깊이-사슴 연못’(2019) 학고재 제공
박광수가 검은 드로잉으로 담고자 했던 것은 사라짐이었다. 존재의 불완전함과 소멸의 불가항력을 작업의 주제로 삼았다.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 지속하다 변화하는 것의 서사를 담아내고자 했다. ‘검은 숲 속’ ‘부스러진’ 등의 제목을 가진 작품들은 숲으로 들어간 뒤 사라져버린 사람 또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잠드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줬다. 작가는 이 대상들을 “늙어가는 사람, 불타 없어지는 에너지, 추락해서 부서지는 선들”이라고 말했다. 모습들은 때로는 온전한 회화 작업으로, 때로는 수백, 수천 장의 드로잉을 엮은 영상 작업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깊이-사슴 연못’(2019)은 이러한 초기 작업에서 이어진 2019년의 작품이다. 여기 화면의 중심 근처에는 깊은 숲속, 검은 연못이 있다. 연못의 한가운데는 빛의 반짝임처럼 짧은 물결이 응집하여 일고 있다. 물결의 짧은 선은 점차 길어져 연못과 물가를 따라 자라는 잡초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잡초가 덩어리진 뭉치 속에는 마른 나뭇가지들도 군데군데 섞인 듯하다. 나뭇가지의 출처인 키가 크고 가느다란 나무가 그 위로 빽빽이 우거져 있다. 연못의 수면 위로 이 모든 요소가 한곳에 비추어 새로운 장면을 형성한다.

즉, 사슴 연못을 그린 이 작품에는 현실과 허구가 함께 존재하며 이는 관람자에게 상상의 서사를 만들게 한다. 화면 곳곳 숨은 기호들과 작가가 언젠가 쓴 노트는 이 서사의 구성에 흥미를 더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집 뒤편에 숲속을 조금씩 걷고 있다. 어두울 때의 숲속 산책은 밝을 때보다 훨씬 이야기가 많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한다. 발을 헛디딜 수도 있고 뾰족한 것에 찔릴 수도 있다. 그보다 더 위험한 일들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은 감수할 수 있다.”

‘깊이-사슴 연못’은 백석이 1936년 출판한 시집 ‘사슴’을 떠올리게 한다. 회상의 시들이 모인 이 시집에서 백석은 현재를 시점 삼아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대신 회상 자체를 언어로 형상화해 사라진 것을 여기, 지금으로 끌어온다. 이러한 시간의 전개는 박광수의 화면 위에서 스펀지 붓의 떨림으로 시각화한다. 떨림의 결과인 점, 선 또는 면은 서로 앞서지 않으며 동등한 개체로 존재한다. 동등한 개체들은 뒤섞이고 그림 속 형상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흩어져 다시 사라진다.
박광수, ‘돌 줍기’(2022) 학고재 제공
박광수는 최근 다채로운 색을 사용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검은색 농담의 변화를 통해 평면 매체인 회화의 깊이를 고민한 시간 끝에 색의 세계에 관한 탐구를 개시했다. 색은 항상 무언가를 피어나게 하기에 이제 그의 화면에서도 색을 입은 형상들은 표면에서 밖을 향한다. 발산하는 화면의 모습을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필획도 빨라졌다. “정성스럽게 혹은 공격적으로 대상을 긁어가며 그려낸다.” ‘돌 줍기’(2022)는 색채 화면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제 선과 색, 돌과 사람은 검은 회화에서 형상 요소가 그러했듯 동등한 개체로 눈앞에 나타난다. 사라지기 때문에 영원할 수 있는 기억, 불완전하기에 놓을 수 없는 의미처럼 맞물려 함께 존재한다.

◆장재민, 낚시터를 바라본 그림

장재민(1984∼)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금호미술관,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보안 1942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대전시립미술관, 포스코미술관, 우민아트센터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가했다. 제4회 종근당 예술지상, 제36회 중앙미술대전에서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부산현대미술관, 국립해양박물관, 금호미술관 등 다수의 국공립 미술관 및 사립 미술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스스로 경험한 장소의 감각 기억들을 하나의 사진이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을 인지하고, 이러한 총체적 경험들을 회화의 촉각적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는 장재민의 작업 방식은 동시대 회화의 실험 맥락에 있다. 작가는 국내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보고, 기록한 것에서 비롯해 낯선 장소에 얻어낸 경험과 감각을 회화적 언어로 재구성해 풀어낸다. 작품이 감상의 대상을 뛰어넘는 심리적 재현으로서의 풍경화가 되도록 만든다.

장재민은 이러한 시도를 화면 위에 펼쳐 놓을 때 회색 조의 물감을 주로 사용한다. 모든 작품이 같은 톤이기에 풍경의 시간이나 계절을 가늠할 수 없다. 대신 적막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지속하며 가늠할 수 없을 때 오는 어떤 틈이 열린다. 회색의 물감은 붓에 잔뜩 묻혀졌다가 화면 위로 올려져 제 존재를 확연히 드러낸다. 유독 물감의 흔적이 선명한 그의 화면은 온몸을 던져 그리는 작업의 순간을 보여준다. 힘과 떨림이 담긴 특유의 붓질은 그림을 마주할 때 시각과 촉각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장재민, ‘저수지 상류’(2020) 학고재 제공
‘저수지 상류’(2020)는 작가가 저수지 낚시터를 방문하고 그린 작품이다. 공중에서 내려본 시선이 포착한 것은 물 한가운데 떠 있는 수상 낚시터의 모습이다. 누군가가 작은 보트로 내려주었을 좌대에 가만히 앉은 사람이 보인다. 사람이 더 보이지 않는 고요한 풍경이지만 그 위로 그어진 사선에서 후드득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 있는 절벽을 뒤덮은 수풀과 나무도 비와 함께 강으로 쏟아져 내릴 것 같다.

작가는 낚시터를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이상한 배열들을” 만나기 좋은 장소라며 화가 노충현과의 대화에서 다음 같이 말한 바 있다. “저에게 낯선 곳을 만나는 일, 일상적인 경험에서와는 다른 감각을 쓰게 만드는 일들은 결국 일상의 어떤 조건들을 환기시켜주는 매개체 같아요. 극도로 적막하거나, 막다른 길에 접어들거나, 의외의 풍경 앞에 놓일 때 발걸음을 재빨리 옮기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편이에요. 그리고 밤낚시를 가게 되면 하루를 꼬박 새고 아침에서야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요. 해가 뜰 즈음 주변을 둘러보면 밤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풍경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발밑 상태, 등 뒤의 절벽, 건너편 산, 모든 게 새롭게 다가올 때가 있어요.”

이 작품은 크기가 세로 312㎝, 가로 235㎝에 달한다. 분할되지 않은 하나의 거대한 화면을 마주하니 작품 자체가 풍경이 되어 내 앞에 출현한다.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숲으로 그리고 풍경으로 들어가고 싶은 시간이 되어서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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