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지독한 사랑이 시작됐다

조혜정 2022. 10. 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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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인터뷰 _ '백령도 물범 지킴이' 박정운 사무국장
박정운 ‘백령도 점박이물범 생태관광협의체’ 사무국장이 27일 인천 옹진군 백령도 하늬해변에서 물범을 관찰하다 사진 취재에 응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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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물범바위에 올라와 있네요. 인공쉼터까지 포함하면 지금 100여마리 정도 되는 것 같은데요? 인공쉼터 앞으로, 바닷속에서 머리만 빼꼼히 내밀고 이쪽을 보고 있는 두 마리도 보이시죠?”

지난 27일 오후, 인천 옹진군 백령도 북동쪽 하늬해변에서 바다 쪽을 가리키며 박정운(48) ‘백령도 점박이물범 생태관광협의체’ 사무국장이 이렇게 말했다. 물범은 포유류여서 호흡, 체온조절 등을 하려면 반드시 주기적으로 물 위로 나와 휴식해야 하는데, 연안 바위들은 좋은 휴식처다. 맨눈으로 한번에 알아보기엔 제법 먼 거리라 “어디요? 그게 어떻게 보이세요?”만 반복하는 기자에게 박 사무국장이 사진기로 물범에 초점을 맞춘 뒤 화면을 보여주며 웃었다. “하하. 처음 보시는 거라 잘 안 보일 수 있어요. 저는 오래 봤잖아요.”

이날은 옅게 깔린 해무에 가렸지만, 시야가 좋은 날엔 바다 건너 북한 땅 용연 지역이 보이는 백령도는 대한민국 서해 최북단 섬이다. 인천항에서 배로 4시간가량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이곳엔 멸종위기동물이자 천연기념물, 해양보호생물인 점박이물범이 산다. 번식기인 겨울엔 중국 보하이 랴오둥만의 얼음 위에서 지내다, 이듬해 봄~늦가을 백령도로 돌아온다. 백령도는 한국에서 가장 큰 점박이물범 서식지로 매년 300여마리가 찾는데, 올 추석엔 하늬해변에서 150여마리, 섬 남동쪽 연봉바위 주변에서 100여마리, 북서쪽 두무진 쪽에서 10마리 정도가 관찰됐다. 충남 서산시 가로림만에도 10여마리가 산다.

첫눈에 반해버린 ‘물범’

박 사무국장은 그 물범을 따라, 20여년 서울살이를 접고 2019년 봄 백령도에 터를 잡았다. “2006년에 처음 백령도에 와서 물범을 봤어요. 그때는 조사차 배를 타고 물범바위 근처로 갔는데, 누워 있던 이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보는 거예요. 배 뒤쪽으로 쭉 둘러서서 저희를 관찰하는 아이들도 있었고요. 야생에서 독립적인 힘을 갖고 살아가는 생명체가 보여주는 그 생기가 정말 반짝반짝했어요. 그때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요.” 지독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처음부터 물범은 아니었다. 1996년 녹색연합에서 일을 시작해 자연생태국, 녹색사회연구소 등에서 습지·갯벌과 멸종위기동물 보호, 개발주의 문제 등을 다뤘다. “습지식물 들여다봐야지, 갯벌 저서생물(수중 바닥에 서식하는 생물) 봐야지, 새도 봐야지, 육상에서 산림생태 쫓아다니면서 야생동물 흔적도 찾아야지.” 할 일도, 공부할 것도, 누벼야 할 현장도 많았다. 충남 서산·홍성 시골에서 자란 덕에 ‘생태 감수성’이 예민해서였을까, 모든 게 그저 흥미로웠다.

그 무렵 녹색연합이 백령도 점박이물범 서식 실태조사(2004년)를 시작했고, 박 사무국장도 뒤이어 이 사업에 합류했다. “백두대간이든 울진이든, 맨날 산양 똥이나 나뭇가지 비벼놓은 자리, 털 한 오라기, 발자국 이런 ‘흔적’만 쫓을 뿐 실체는 볼 수도 없었는데 바다에 와서 물범을 딱 본” 뒤로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엔 물범뿐이었다.

27일 물범바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점박이물범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2007년 주민 점박이물범 관찰과 교육 등을 시작하면서, 물범과 함께 살아가는 백령도 주민이 물범 보호에도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시작했다. 쉽진 않았다. 접경지역인 백령도는 한국에서 섬 크기로 8번째지만 북방한계선과 어로한계선 때문에 섬 사방 800m 안에서만 어로 활동을 할 수 있어 어장 자체가 굉장히 작고, 주된 산업도 어업이 아니라 농업이다. 다른 섬보다 배가 적다는 건, 물범들에겐 먹을거리 풍부하고 안정적인 서식 환경이 있다는 뜻이다. 물범 서식지 3곳은 모두 어촌계를 끼고 있어, 어민과 물범은 같은 바다를 두고 경쟁한다.

이 때문에 물범들이 까나리 그물 주변으로 몰려들어 발톱으로 그물을 찢어놓고, 통발에서 우럭이나 쥐노래미를 꺼내 먹고선 통발 입구를 늘려놓거나 낚시할 때 낚아채 가서 어민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종종 생긴다. 게다가 백령도는 사곶천연비행장, 두무진, 콩돌해변 같은 천연기념물도 많고, 군사 지역이라 많은 지역이 철망으로 막혀 있어 주민들이 오랫동안 규제를 많이 받아왔다. 그러니 “물범을 보호하자거나, 서식지를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하자고 하면 규제를 또 만들자는 걸로 생각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물범으로선, 바위에 붙은 홍합이나 근처 다시마, 미역 등을 채취하려고 배나 사람이 오면 바위 위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불리한 상황에 놓인다.

주민 참여 없이 사람과 물범이 공존할 방법을 찾을 순 없었다. 군인 면회객이나 안보관광객 말고도 물범이 있어서 백령도를 찾아오는 사람이 생기도록, 이를 통해 주민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걸 보여주려고 녹색연합은 해양생태관광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주민들을 상대로 점박이물범 생태해설사 양성 과정을 진행하는 한편, 초중고 학생들에겐 생태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물범이 있어 더 아름다운 백령도’라는 자부심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달라진 주민들의 ‘물범 챙기기’

더디지만 변화는 있었다. 생태해설사 양성 과정에 참여했던 주민들이 2013년 ‘점박이물범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점사모)을 결성해 모니터링과 교육활동, 해양쓰레기 수거, 보고서 작성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8년 11월엔, 어업을 하는 한 회원이 오랫동안 물범을 지켜보면서 했던 생각이 인공쉼터로 현실화돼 이듬해부터 물범들의 휴식처로 자리 잡았다. “물범들이 바위 위에서 쉴 때 자리싸움을 많이 하거든요. 약한 애들은 못 올라갈 때가 있어요. 그걸 오래 보신 한 회원분이 ‘바위를 좀 더 갖다 놓든지 자리를 넓혀주자’고 제안을 하셨어요. 연구자라도 현장에서 물범과 함께 생활하지 않는다면 못 했을 생각이죠.” 번식기인 겨울, 중국 보하이 랴오둥만으로 올라갔다 2019년 봄 되돌아온 물범들 중에 인공쉼터를 찾는 개체들이 관찰됐다.

박정운 사무국장과 박찬교 ‘점박이물범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부회장이 28일 물범을 관찰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없던 바위가 떡하니 생겼으니, 처음엔 호기심 많은 애들이 그 주변을 탐사하더라고요. 그러다 여름에 인공쉼터 위로 올라간 거예요. 마침 그해 여름에 백령도 연안에 백상아리가 나타났는데, 겁을 먹은 아이들까지 올라오면서 한 20여마리가 이용하더라고요. 다쳐서 물범바위 자리싸움에 낄 수 없는 애들도 여기로 왔어요. 한번은, 다른 애들은 다 물범바위에 가 있는데 하나가 혼자 여기 있더라고요. 다친 아이였는데 상처가 아물 때까지 며칠 동안 여기서 치유를 한 거였어요. 올해까지 계속 이렇게 지켜보니, 체력이 달리든, 어리든 아무튼 저쪽에 끼기 어렵거나 호기심 많은 아이들, 새로 태어나서 백령도에서의 경험치가 없는 아이들이 인공쉼터를 이용하는 패턴이 보여요.”

2017년 결성된 백령중·고의 물범 동아리도 지역사회에서 물범을 둘러싼 인식을 긍정적으로 돌리는 데 힘이 됐다. 청소년 생태학교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주축이 돼 만든 동아리인데, 8월25일을 ‘점박이물범의 날’로 정하고 매년 이날을 전후해 일주일 동안 물범 보호 캠페인을 진행한다. 2011년 제주 중문해수욕장에서 탈진한 채 발견된 어린 물범 ‘복돌이’를 2016년 8월25일 백령도 하늬해변 물범바위 근처에 방류했는데 이날을 기념한 것이다. 이 동아리를 만든 학생 가운데 2명은 당시 복돌이와 함께 배를 타고 가, 케이지 문을 직접 열어줬다. 동아리 활동 덕에 진로를 정한 학생들도 있다. “처음 동아리 시작했던 친구 중에 한명이 해양 관련 전공을 하고 싶다며 동아리 활동을 바탕으로 자기소개서를 쓰고 그걸로 대학을 갔어요. 그다음 해에도 동아리 회장을 한 학생이 해양 쪽으로 갔고요. 학부모들, 학생들한테 크게 관심을 받았죠. 연말엔 동아리에서 1년 동안 했던 탐구활동 발표회를 하는데, 학교 밖에 장소를 잡고 어른들을 초청해요. 그걸 본 어른들은 아이들이 물범 조사, 해양쓰레기 문제 등을 발표하는 걸 보고 깜짝 놀라요. 놀러 다니는 줄 알았는데 공부를 하고, 발표도 하고 대학까지 가니까요.” 동아리 학생들이 물범연구센터를 만들면 좋겠다고 한 아이디어는 옹진군의 ‘물범 에코센터’ 건립 계획에 반영되기도 했다.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던 중 녹색연합에서 중앙 단위의 물범 관련 사업을 정리하고, 후속 대응은 지역 조직인 인천녹색연합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조금씩 변화는 생겼지만 전반적으로는 물범 보호 활동이 침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녹색사회연구소 사무국장을 맡아 물범과 주민의 공존 방안을 찾던 박 사무국장에게 ‘정리의 시간’이 찾아왔다. “제가 연구소에서 일하며 자본주의 생산·소비 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환경 문제의 해법을 찾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을 때였어요. 연구소 본연의 일보다 백령도 왔다 갔다 하는 데 더 마음이 쏠려 있어, 결단이 필요했어요. 녹색연합이 시민사회와 환경운동 진영에서 백령도 물범 보호 활동을 오랫동안 얘기해왔는데, 이걸 놓는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할 거냐는 부담도 있었고요. 오랫동안 만나온 주민들, 학생들한테도 지금 손을 떼면 부끄러울 것 같았어요.” 환경운동가라는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지, 그냥 여러 사람이 만들어놓은 공간에서 혜택만 누리며 묻어가고 있는 건지 고민하던 시기였다.

백령도 하늬해변 들머리 ‘진촌리 현무암 탐방안내소’에서 박정운 사무국장이 정혜진 국가지질공원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령도는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돼있는데, 하늬해변엔 맨틀을 구성하는 감람석이 박힌 현무암이 분포돼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연구소 일은 그걸 더 할 수 있는 책임과 능력이 안 된다는 판단이 섰지만, 백령도에선 주민들과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현장이 이곳이니, 물범을 보호하는 방법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중앙 활동’을 접고, 2019년 3월 백령도로 이주했다. 물범 보호 사업을 계속하려고 인천녹색연합 특별기구로 ‘황해물범시민사업단’을 꾸려 단장직을 맡았다.

“결혼은 안 했고, 부모님이나 가족들은 어릴 때부터 내 방식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그런가 보다” 하기에 백령도 주민이 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고비는 ‘생활’에서 왔다. 아무리 자주 다녔어도, 아예 눌러앉는 건 다른 얘기였다. “왜 왔냐” “언제까지 있을 거냐”는 질문이 항상 따라다녔다. 물범에 관심을 갖고 앞장서 보호활동을 하는 점사모 회원들도 지역사회에선 달갑지 않은 시선을 종종 감수해야 했기에, 예민한 사안이 생기면 “당신은 떠나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남아서 다른 주민들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어렵게 말을 꺼내기도 했다. 정보도 연고도 없는 곳에서 집과 사무실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자기 차가 없으면 움직이기 힘든 곳이라, “인생 계획에 없던 운전면허까지 땄다”.

현장의 의미

무엇보다 지금까지도 조심스러운 건 주민들과의 관계다. “점사모 회원분들이 제가 여기 정착하는 걸 정말 많이 도와주시고, 활동하는 데 울타리가 돼주세요. 그런데 이전까지 저는 일 중심으로 사고하던 사람이어서, 관계 맺기에 서툴러요. 도시에서 활동할 땐 주민들을 만나도 현안과 관련된 얘기만 하고 결과를 잘 만들어내면 됐었는데, 여기는 안 그래요. 아침에 뭐 논의하러 갔다가 같이 밭에 가서 일하고 점심 먹고, 바닷가에 뭐 하러 간다고 하면 따라갔다 같이 저녁 먹고, 이런 편안하고 일상적인 접촉이 중요해요. 여기서 삶을 다시 배우는 중이랄까요. 그런데 지난해 5월 하늬해변이 국가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제가 너무 바빠졌어요. 제 일이 확장되는 과정이지만, 주민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안 되는데 여전히 서투네요.”

그래도 “물범 덕분에” 현장 중심의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건 큰 성과다. 서울에 있을 땐 뭘 해보려고 해도 만나기조차 쉽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는 물범과 박 사무국장이 있는 백령도로 온다. 서울에선 답이 잘 안 나오던 문제도, 물범과 함께 사는 주민들과 같이 접근하면 지속가능한 해법을 찾아낼 수 있다. “예전에 선배들한테 ‘현장을 가야 된다’고 들었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현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환경운동의 의미를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저는 여기서 제 나름대로 시도해보고 있는 거예요.” 하루에도 몇번씩 물범을 보러 가지만, 여전히 그때마다 눈빛이 생기로 반짝거린다.

27일 백령도 하늬해변 앞 인공쉼터 쪽 바닷속에서 점박이물범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그렇다고 물범 보호를 “지금 내가 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여기는 건 아니다. 박 사무국장은 “지구 생태계의 변화 속에서 물범들 번식지의 얼음이 다 녹고, 서식지도 사라지는 시기가 올 수 있겠죠”라며 “적어도 얘들이 번식, 서식 환경 변화에 적응력을 높여서 스스로 변화하든 다른 생존지역을 찾아내든 해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주는 게 저와 주민들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백령도/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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