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시는 이미 죽었다" 50년 시 쓴 정호승의 탄식

김정연 2022. 10. 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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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신간 『슬픔이 택배로 왔다』출간을 기념해 열린 북토크에서 정호승 시인은 "시인으로 산 50년 중 시를 정말 단 한 편도 안쓰고 '시를 버린' 시간이 15년쯤 되는데, 그럼에도 시가 나를 버리지 않은 덕에 다시 시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정연 기자


"여러분 택배 많이 받으시죠? 저는 책보다 먹을 게 오는 게 더 좋더라고요(웃음). 근데 하루는 택배가 오기는 왔는데 슬픔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등단 50년을 채운 시인 정호승(72)이 택배 상자를 보고서 떠오른 생각을 새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에 담았다.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북토크에서 시인은 "시집이 나온 뒤 집으로 배송을 받았는데, 배송장에 『슬픔이 택배로 왔다』라고 적힌 게 웃겨서 기념으로 오려놨다. 정말로 슬픔이 택배로 온 것 같더라"며 "택배가 잘못 오면 반환할 수 있다. 근데 슬픔, 비극이라는 택배는 반환할 데가 없다. 나는 요즘 비극이라는 택배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비극은 나이가 들며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친구의 투병 소식을 들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이별, '죽음'이다. 시인은 "곰곰히 생각해보니 슬픔은 결국 이별을 말하는 거였다"며 "그 중 죽음을 통한 이별이 가장 견딜 수 없는 이별"이라고 덧붙였다.


"행복은 향기처럼 순간뿐, 행복한 순간이 오면 그치려고 한다"


"시나 시집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솔직히 말한 시인은 생계를 위해 회사를 40대까지 다녔고, 회사를 나온 뒤에는 강연 등으로 생활을 해결했다고 전했다. 그는 "원래 저는 수줍음이 정말 많은 사람인데, 지금은 되게 얼굴 두껍고 뻔뻔하게 얘기를 잘하죠?"라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 사진 창비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동시),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시),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에 당선되며 50년간 글을 써온 시인은 이번이 14번째 시집 출간이다. 사회자가 북토크 초반에 그의 시집 제목을 쭉 읊는 걸 들은 뒤 "시집을 너무 많이 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며 농담처럼 말한 시인은 "50년동안 시인으로 존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안했다"며 "중간에 15년 정도 시를 버린 적이 있지만, 시가 나를 안 버린 덕에 이렇게 시를 50년 씩이나 쓰게 됐다"고 말했다.

『슬픔이 택배로 왔다』에는 125편의 시를 담았다. 시인은 "예전에는 신작 시집을 내고 나면 매번 '아이고, 난 다시는 시 안쓴다' 생각하고, 진짜로 1년 정도는 시 생각도 안했다"며 "그런데 이번에는 시를 열심히 쓰다 보니 130편도 넘게 너무 많이 쓰고, 원고를 넘기고 나서도 시를 또 쓰고 싶어서 계속 썼다"고 작업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다시는 시를 안써야지' 생각하던 건 오만이었고, 50주년인 지금을 기점으로 앞으로 시인의 삶을 더 열심히 살아야지 생각한다"고 말했다.

슬픔에서 시를 길어내는 그는 "행복한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 순간에 그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법정 스님의 '행복할 때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는 말을 언급하며 "행복할 때 행복에 매달리면 진짜 불행해지는 것 같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시인은 "인생의 본질은 지속적인 슬픔과 고통이고, 기쁨과 행복이라는 향기가 살짝 스쳐 지나가는 것 뿐"이라며 "향기가 계속되면 냄새다. 지속적인 행복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인터넷에서 시는 이미 죽었어요" 틀린 시 아무리 지워도 없어지지 않아


"저는 나이가 칠십이 넘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칠십이 됐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60살 때를 생각해보면 10년이 1년처럼 갔는데, 뭘 했나 생각해보니 맨날 밥이나 많이 먹고 화장실 많이 갔더라고요."

자신의 시를 좋아해 찾아온 독자 50여명을 앞에 둔 시인의 말은 훨씬 더 부드럽고 다정하며 자유로웠다. 그가 농담처럼 던지는 자신의 일상적 생각에 사람들은 수시로 웃었고, 시인이 시를 꺼내 읽을 땐 저마다 휴대전화를 들어 영상에 담으며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했다.

"저는 죽을 때까지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를 써서 얻는 건 영혼의 기쁨이지, 시나 시집으로는 생활이 해결되지 않아요" 등 솔직한 말을 농담처럼 하던 시인은 인터넷 상에 퍼지는 잘못된 시에 대해 얘기할 때는 톤이 달라졌다.

시인은 "인터넷 상에서 시는 이미 죽었다. 시체화가 됐다"고 몇번이나 말하며 "인터넷으로 시가 옮겨지면서 원문이 파괴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인터넷 시대에 가장 피해를 받은 예술 분야는 시라고 생각한다"고 한탄했다. 그는 "시는 토씨 하나, 행간까지도 중요한데 그런 건 다 무시하고, 뚝 끊어서 편집하거나 틀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며 "내 시 중 '풍경 달다'는 '풍경 소리'로, '강변역에서'는 '강변 옆에서'로, '밥그릇'은 '개밥그릇'으로 제목을 입맛대로 고치는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토로했다. 캘리그라피, 붓글씨로 옮겨지는 시도 틀린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예 다른 사람이 쓴 시에 '정호승' 이름이 붙어 퍼지는 경우가 가장 곤혹스럽다고 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로 시작하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그의 첫 책 제목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와 같은 제목의 다른 시도 그가 쓴 것처럼 퍼져 일일이 찾아내느라 고생도 했다. 시인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이버, 다음에 게시물 중단요청을 하는 것밖에 없는데, 아무리 해도 없어지지가 않아요"라며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게시물을 지워달라고 하기 위해서 회원가입까지 해가며 '시인 정호승입니다, 저는 이런 시를 쓴 적도 발표한 적도 없습니다'라고 댓글을 달기까지 하는데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시인은 "시인은 죽어 흙이 되지만, 몇 편의 시는 남지 않나. 시인보다는 시가 더 중요하다"며 시를 자기 것처럼 읽어 달라고 했다. "아름다운 가을 밤인데 딴 데 안 가시고 여기 와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며 독자들에게 감사를 표한 시인은 "인생은 시간인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짧더라"며 "시간이 주어지고 마음이 주어지는 한 계속 시를 쓸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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