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육지사람이 본 제주 식재료엔 특별함 있다..'비자오일' 두른 감자수프

강병욱 입력 2022. 10. 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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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강병욱의 제주 식재료 이야기(3)

제주에서는 흔히 제주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 온 것들을 통칭하여 ‘육지’라는 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인천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제주로 가지고 오면 ‘육지 제품’이라 하며, 나와 같이 제주 태생은 아니지만 제주에서 생업을 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육지사람’이라고 지칭한다. 섬과 육지를 나눠서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지만 ‘육지사람’이라는 말이 참 정겹게 다가온다. ‘육지사람’이 바라본 제주의 식재료는 육지와는 다른 뭔가 특별함이 있다. 짧은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마음을 하나하나 이야기로 풀어 보려고 한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고즈넉한 ‘김녕’의 해변을 따라 조금 산 쪽으로 이동하면, 비자나무로 뒤덮인 비자나무숲을 만날 수 있다. 제주시 구좌읍 비자림은 약 10만여 평 크기에 약 2700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비자나무는 한국의 남부 지방과 제주도에 고루 분포된 것으로 조사됐는데 전남 강진군, 진도군, 장성군을 이어 비자나무 자생지로 천연기념물로 등재되었다.(천연기념물 제374호). 특히 제주 비자림은 ‘천년 비자 숲’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주로 300~600년 된 나무가 주로 분포돼 있다. 그중 천 년 가까이 된 비자나무도 있다고 하니 그 역사가 얼마나 깊은지 유추해 볼 수 있다.

국가에서 편찬한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오래전부터 비자나무를 사용한 기록이 나와 있다. 기록에 의하면 제주도에서 나는 비자나무는 목재, 가구의 재료로 쓰이기도 했고, 특히 바둑판을 만들 때는 이 비자나무를 꼭 사용했다. 또 궁궐에 보내는 공물의 역할을 할 만큼 그 우수성이 오래전부터 증명됐다.

비자나무에서 열리는 열매 또한 그 쓰임이 상당히 흥미롭다. 비자 열매는 약간 둥글고 작은 달걀모양이며, 길이는 약 3㎝ 정도다. 표면은 회황색이거나 연한 황갈색이며, 세로로 주름이 잡혀 있고 양쪽에 작은 돌기가 있는 모습이다. 씨눈이 두 개여서 ‘두눈쟁이비자나무’ 혹은 ‘양코배기 비자나무라’는 별명이 있다. 몇 개의 비자 열매를 손에 넣어 움직이면 특유의 좋은 향이 올라온다. 맛은 조금 쌉싸름하고 약간 쓴맛과 떫은맛도 함께 있는 흥미로운 맛이다. 그렇다고 목 넘김에 거부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단 미끄러지듯이 부드럽다.

비자 열매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곁에서 다양하게 사용됐다. 구충제가 없던 시절에는 비자 열매가 구충제 역할을 했고, 스님들이 비자 열매를 거두어 많은 사람에게 나눠 주며 그 효능을 전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자는 회충을 없애는 좋은 약물이며 노인과 소아에게 좋은 간식거리였다. 하루에 50g 정도 껍질을 벗기고 살짝 볶아 씹어 먹으면 소화 기능에 도움을 주어 식욕을 다시 돌아오게 해주고 변비나 치질과 같은 질환에도 좋은 효과를 주었다. 또 복통이나 생혈, 뱀에 물린 상처까지 치유에 도움이 되었다. 기침이나 폐가 좋지 않으면 매일 밤 물에 비자 오일을 넣어 마시면 다음 날 보기 좋게 나았다. 열매의 바깥 껍질과 속에 있는 종자는 모두 치질 치료제로 쓰이는데, 비자의 외피가 치유 효과의 절반을 차지한다. 즉 비자 열매의 겉껍질이 주된 치료제이자 약의 목적으로 사용된다.

비자나무의 또 하나의 매력은 비자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로 기름을 만드는 것이다. [사진 강병욱]


비자나무의 또 하나의 매력은 비자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로 기름을 만드는 것이다. 비자열매의 개화기는 4월이지만 가을인 10월쯤에 성숙기가 찾아와 무르익으며 자연적으로 바닥으로 떨어진다. 비자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시기가 가을이기 때문에 일 년 동안 쓸 비자열매를 이 시기에 모두 모아둔다. 수확 시기가 가을에 몰려있어서 마을에서도 가을 시즌에만 모여서 수확을 한다.

그럼 비자 열매가 오일로 탄생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알아보자. 가을에 수확한 비자 열매를 잘 보관해 착유하기 하루 전에 깨끗하게 세척해서 말린 뒤 하루 동안 잘 마른 비자를 볶지 않고 그대로 다음날 저온 착유기로 착유한다. 비자 오일은 주로 무침이나 부침, 샐러드용으로 많이 사용했고 약용으로도 사용되었다. 비자 오일은 특유의 편백 향이 나며 보습력이 좋아 아토피 치료에 좋다고 하며, 불포화 지방산이 많아 심장질환의 예방을 늦춰주어 예로부터 민간요법으로 많이 애용됐다.

그럼 완성된 비자 오일은 어떤 느낌일까? 비자 오일을 작은 그릇에 옮겨 담고 그 향을 음미했다. 마치 울창한 살림 속 안에 빠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깊은 향이었다. 유럽의 최고급 올리브 오일보다 더 깊은 향기를 갖고 있었다. 그 향에 취해가며 조금 입에 털어놓아 보니,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사탕과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 오일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오일로 느껴졌다.

해외 레스토랑에서 근무할 때 정말 다양한 오일을 만들어 사용했다. 야채를 활용한 오일은 물론, 가장 인상 깊게 본 오일은 숯을 활용해서 만든 오일이었다. 상상하기 힘든 맛과 향이었지만, 우리가 고기를 구워 먹을 때 올라오는 숯의 향기가 오일에서 느껴져 놀라웠던 적이 있다. 비자 오일 역시 그때의 느낌과 비교했을 때 동급으로 좋은 느낌을 안겨주었다.

감자수프에 빵가루와 허브 등을 넣어 보기 좋게 마무리한 뒤 비자 오일을 살짝 둘러 끝낸다. 워낙 향이 강하기 때문에 살짝만 넣어도 그 향을 느낄 수 있다. [사진 강병욱]


직접 느껴본 비자 오일을 음식에 접목해보기로 했다. 어떠한 음식이 잘 맞을까 고민하던 중 불현듯 해외 생활을 하면서 주로 아침에 먹었던 감자 수프가 떠올랐다. 우선 냄비에 버터를 살짝 녹여주고 채 썬 양파를 넣어 살짝 볶아준다. 야채는 기호에 따라서 다르지만 양파만 넣어도 근사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정도 양파가 익으면 적당하게 썬 감자를 넣어주고 다시 조금 더 볶아준다. 감자가 살짝 색이 나오면 우유를 넣고 푹 끓여 준다. 생크림을 넣기도 하지만 굳이 넣지 않아도 맛있다. 시간을 계속 확인하면서 감자의 익힘을 확인하고 감자가 익으면 블렌더를 넣어 곱게 갈아준다. 기본적인 소금과 후추 간을 하고 먹기 좋게 담아낸다. 마지막에 빵가루와 허브 등을 넣어 보기 좋게 마무리한 뒤 비자 오일을 살짝 둘러 끝낸다. 워낙 향이 강하기 때문에 살짝만 넣어도 그 향을 느낄 수 있다. 감자의 향과 비자 오일의 향이 어우러지니 숲속에서 수프를 먹는 뜻한 착각이 든다. 소량으로도 이만한 행복을 느끼게 해주니 가정에서도 체험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비자나무를 조사하기 위해 비자림을 걸으면서 땅에 떨어진 비자나무의 잎을 만져보았다. 소나무만큼 뾰족하지 않지만 날카롭고 둥글둥글하다. 자신을 보호하는 하나의 장치라고 생각한다. 오래전 제주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듯이 날을 새워서 자신을 보호하지만 세월이 지나 조금은 마음이 무뎌지고 풀리지 않는 용서를 받아들이는 지금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우리의 식재료를 알아가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지금 보고 먹는 것들의 오래된 이야기와 역사를 함께 알아갔으면 좋겠다.

넘은봄 셰프 puzzlet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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