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누가봐도 조선시대 목판인데.. 日학자도 깜짝 놀란 中 역사왜곡

허윤희 기자 2022. 10. 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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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란저우大 학술지서 왜곡
동북공정보다 심각한 이유
그래픽=송윤혜

‘엇, 이건 분명히 조선시대 목판인데···.’

일본 역사학자인 미야 노리코(宮紀子) 교토대 교수는 최근 구입한 중국 학술지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간쑤성 란저우(蘭州)대학교가 지난 5월 발간한 실크로드 책자에서 명백한 오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책은 아르메니아의 마테나다란(Matenadaran) 고문서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후기 목판 사진을 싣고 ‘중국 목판’이라는 설명을 달아놓았다. 미야 교수는 “판면에 적힌 제목을 굳이 보지 않아도 옆으로 긴 판형과 장식 문양 등 조선시대 목판의 특징이 뚜렷한 작품”이라며 “서지학에 조금이라도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데 왜 이걸 중국 목판으로 소개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라고 했다. 미야 교수는 본지에 이 같은 내용과 함께 책자 표지와 목차, 도판 사진을 보내왔다.

중국 란저우대에서 출간한 '실크로드의 인문학과 예술' 제1집 표지. /미야 노리코 교토대 교수 제공
중국 란저우대에서 출간한 '실크로드의 인문학과 예술' 제1집. 도판 맨 아래에 아르메니아 마테나다란 고문서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후기 '경현록' 목판 사진을 싣고 '중국 목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미야 노리코 교토대 교수 제공

◇조선 목판을 버젓이 중국 유물로

중국 란저우대 ‘실크로드 예술연구 및 국제교류센터’가 지난 5월 학술지 ‘실크로드의 인문학과 예술’ 제1집에서 아르메니아에 소장된 18세기 조선 후기 목판 ‘경현록’을 ‘중국 목판’으로 소개해 출간한 것으로 확인됐다. 미야 교수가 제공한 사진을 검토한 복수의 국내 서지학·목판 연구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조선 후기 목판”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사진 속 목판의 가운데 판심(책으로 엮을 때 접히는 부분)을 보면 위아래로 화문어미(花紋魚尾)라고 부르는 꽃모양 장식 문양이 보인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목판에는 없는 조선 목판의 특징”이라며 “어미의 문양은 시기에 따라 다르다. 이 목판은 접었을 때 꽃잎이 두 개인 이엽화문(二葉花紋) 어미인데, 주로 조선 후기에 이런 문양이 많이 보인다”고 했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목판기록문화연구소장은 “판심과 어미도 뚜렷하지만, 무엇보다 판면에 ‘경현속록(景賢續錄)’ 하권(下卷) 제1장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1719년 조선 숙종대 학자 김하석이 조선 전기 유학자 김굉필과 관련된 문헌을 수집해 엮은 ‘경현록’의 일부”라며 “사진 속 두 목판은 도동서원에서 만든 ‘경현속록’ 하권 1~2면과 20~21면”이라고 말했다.

란저우대 출간 학술지 사진 속 왼쪽 목판. 조선 후기 목판 '경현록'이다. /미야 노리코 교토대 교수 제공
란저우대 출간 학술지 사진 속 오른쪽 목판. 조선 후기 목판 '경현록'이다. /미야 노리코 교토대 교수 제공
란저우대 학술지에 소개된 목판(위 사진)의 인쇄본(왼쪽 면). 판각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

이 같은 사실은 최근 중국 국가박물관의 역사 왜곡에 이어 서아시아에 있는 조선시대 유물까지 중국 것으로 발표한 첫 사례라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중국 국가박물관은 한·중 수교 30년을 기념하는 ‘한·중·일 고대 청동기 유물전’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제공한 한국 역사 관련 연표 중 고구려와 발해를 의도적으로 빼고 게시해 논란이 됐다. 중국은 우리 측의 수정 요구에도 아무런 회신을 하지 않다가 뒤늦게 연표를 철거했지만, 지금까지도 분명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미야 교수는 “학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조선 목판인데, 혹시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와 관련해 아르메니아와 중국 간 관계를 강화할 목적으로 굳이 중국 유물이라고 소개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국내 실크로드 연구자 A씨는 “아르메니아 현지 박물관 관계자들이 한문으로 된 목판을 중국 것이라고 착각할 수는 있겠지만, 이를 촬영한 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소개한 란저우대학의 수준이 한심하다. 의도적이었다고 해도, 몰랐다고 해도 국제적인 망신”이라며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학술적으로 얼마나 허술하게 진행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학술 문제로 해결하라더니

일대일로는 중국이 외국에 철도, 도로, 항만, 발전소 등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해 주고 해당 국가와 경제·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프로젝트다. ‘육·해상 실크로드’로 불린다. 2013년 시진핑 주석이 카자흐스탄, 인도네시아 순방 때 처음 주장했으며, 지금까지 1조달러(약 1400조원)가 투입됐다.

란저우대가 출간한 이 학술지는 중국이 일대일로의 일환으로 실크로드 연관 국가들과 문화 교류를 강화하기 위해 진행 중인 국책 사업의 결과물로 추정된다. 간쑤성의 성도(省都)인 란저우는 신장, 티베트를 포함한 중국 서북 지역을 총괄하는 곳으로, 란저우대는 실크로드 연구 성과물이 중국에서 가장 많이 출판되는 곳 중 하나다. 이번 책은 실크로드 관련 최근 학술 동향과 연구 성과를 소개하면서, 주요 국가인 아르메니아를 특집 기사 형태로 소개했다. 란저우대는 출간 소개 글에서 “중국 사회과학기금 중요 프로젝트 ‘실크로드 국제예술교류사업’의 중간 보고이며, 란저우대 ‘실크로드 예술연구 및 국제교류센터’의 국제공동연구 성과를 수록했다”고 밝혔다.

최근 국가박물관의 역사 왜곡에 대해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고구려 문제는 하나의 학술 문제”라며 “학술 문제는 학술 영역에서 전문적인 토론과 소통을 할 수 있으며 정치적인 논의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학술 영역에서 버젓이 왜곡이 자행되고 있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실크로드 연구자 A씨는 “중국 국가박물관 문제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일본 학자가 이 같은 오류를 먼저 발견하고 알려준 것도 아이러니하다”며 “아르메니아와 한반도의 교류 증거가 나왔다는 점에서 소장 연유 등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중국 베이징 국가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동방길금' 전시장 입구. /연합뉴스
중국 국가박물관이 한·중·일 청동기 유물 전시장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제공한 연표 중 고구려와 발해를 의도적으로 빼고 게시했다가 한국 측 항의를 받고 연표를 철거한 지난 16일 박물관의 모습. /연합뉴스

◇“동북공정 때보다 심각한 상황”

학계에선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이 과거의 해상과 육상 실크로드처럼 세계 경제를 중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면서 의도적인 역사 왜곡을 시도하고 있는데, 우리 인식과 대응은 여전히 ‘동북공정(東北工程)’ 차원에 머물고 있다”고 우려한다.

중국은 1979년 이전까지만 해도 고조선·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한국 고대사의 나라들을 한국사로 봤으나 덩샤오핑 집권 이후 중국은 자국 내 여러 민족의 역사도 중국사라는 ‘통일적 다민족국가’ 이론을 내세웠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공식적으로 진행된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부여와 고구려·발해를 ‘중국의 지방정부’로 왜곡하는 작업을 했다. 주체는 국무원 산하 중국사회과학원의 ‘변강사지연구중심’이었다. 2004년 고구려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자 환런(桓仁) 등의 고구려 유적에 ‘중국의 지방 정권 고구려’라는 안내판을 달았다.

김현숙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은 “공식적으로 동북공정은 2007년 마무리됐지만, 한국사 왜곡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시진핑 집권 이후 일대일로 정책과 맞물려 역사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중국이 중심이 되는 표준을 만들어가는 상황”이라며 “중국 학계에서 고구려사뿐 아니라 고려와 조선 관련 연구물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한국의 중국 종속성을 한국사 전체에서 부각하려 하고 있다”고 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라고 했다는 시진핑 주석의 말을 전한 바 있다.

김 위원은 “조선의 유물을 중국 것으로 소개한 밑바탕에는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논리가 깔려 있는 것”이라며 “중국의 자민족 중심주의, 패권주의 역사관은 이미 다른 차원으로 확대된 상황인데, 계속 동북공정이란 용어로 중국을 비판하면 확장된 의도의 일부분만 보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했다.

중앙아시아사·실크로드 문화 교류사 연구자인 민병훈 전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은 “중국은 지금 란저우대학교 내에도 아프가니스탄 연구소가 있는데 우리는 동북아역사재단 한 곳에서 일본·발해·고구려사 문제를 총괄하는 형국”이라며 “중앙아시아·서아시아를 포함해 중국 일대일로에 학술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연구기관과 아카이브 재정비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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