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주 LIVE] 법도 피를 먹고 자란다
정치 구호 된 ‘여혐 살인’
감성, 공포 팔아선 해결 못 해
법 정비가 진짜 해결책
“TV 뉴스 보고 듣기가 힘들다. 그중 하나가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표현.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나.” 평소에도 기름기 많은 문장을 싫어하는 소설가였다. 뉴스가 사실을 넘어 감정을 ‘지시하는’ 풍토에 대한 지적이었다.
언어를 신중하게 대해야 하는 공영방송 KBS 뉴스 홈페이지에서 ‘안타까운 죽음’ 표현을 쓴 사회 뉴스를 찾아봤다. 1987년부터 9월 말까지 KBS 뉴스에 총 719번, 1개월에 1.6회꼴로 썼지만, 근년에 올수록 빈번해졌다. 2017년 이후 287번(1개월 4.1회), 2021년 한해에는 86번(1개월 7.1회) 사용했다. 소설가의 예민한 귀는 틀리지 않았다. 부자보다 빈자, 아파트보다 지하방, 남성보다 여성의 죽음에 그런 수식을 많이 썼다. 약자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연민과 공감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아니다. 대책을 요구받는다. 국가 구조와 사회 구성원에게 전방위의 영향을 미치는 법과 제도, 시스템을 흔드는 선택이다. 이때부터는 냉철해야 한다.
지난 14일 서울 신당역에서 여성 역무원이 살해됐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정치인들도 앞다퉈 달려갔다. 박지현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도 거기 있었다.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이것은 분명한 여성 혐오 범죄… 중대한 사회적 재난으로 보고 특별 대책을 세워야 한다.” 진보당, 여성 단체는 “신당역 범죄를 여성 혐오 범죄라고 보지 않는다”는 김현숙 여가부 장관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살인에는 대부분 혐오나 증오가 붙는다. 특정 사건을 ‘혐오 살인’이라 규정하려면 기준이 있다. 결정적인 게 무차별성(indiscrimination)이다. 인종 혐오 범죄는 특정 인종이면 누구든 죽이겠다는 태도와 행위다. 여성, 노인, 아동, 성 소수자, 장애인 무엇을 넣어도 마찬가지다. 신당역 범인 전주환은 피해자를 스토킹하다 살인했다.
‘형사 정책은 피해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피해자가 생겨야 대책이 나온다는 만시지탄이자, 사건의 정확한 진단이 훗날 좋은 정책의 토대가 된다는 얘기다. 진단이 옳아야 처방전이 바로 나온다. “여성이 사망했고 여성들이 그렇다고 하니, 여성 혐오 범죄 맞는다”고 하는 건, 여러 날 생각해봐도 무책임한 타협 같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말한다. “여혐 범죄라는 말이 이제는 정치 담론이 됐다. 여혐의 해법은 ‘교육’이다. 그런데 그게 피해자를 줄이나? 2016년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사법입원 제도’를 토론해야 했다. 안인득 사건은 막을 수도 있었다. 이제는 ‘스토킹 반의사불벌죄’ 조항 폐지를 빨리 밀고 나가야 한다. 여가부 산하 성폭력상담소, 여성긴급전화 1366이 피해자를 영원히 보호하지 못한다. 강력한 처벌이 가장 강력한 교육이다.”
조현병 환자 안인득은 지난 2019년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는 사람을 무차별로 찔렀다. 5명이 죽고, 17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력이 있었지만, ‘인권’ 앞에서 그를 강제 입원시킬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걸 보완하는 게 사법입원(司法入院) 제도다. 강남역 사건은 정신질환자 범죄 예방으로 이어져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 여혐 범죄를 부인하면 왕따당했고, ‘여성은 예비 피해자’라는 선동만이 살아남았다.
신당역 사건 현장을 가장 먼저 본 고위직은 한동훈 법무장관이었다. 그렇다. 이 사건 해결 주체는 경찰청과 법무부다.
사람은 심장이 멎으면 죽는다. 지병, 급성 질환, 추락, 절단 등 심정지를 유발하는 원인은 다양하다. 억울한 죽음에 무조건 ‘여성 혐오’ 라벨을 다는 건, ‘모든 사망 원인은 심정지’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성 피해자들의 핏자국은 흐릿해지고 산 사람은 그렇게 또 살아갈 것이다. 그들의 희생 위에 어떤 법을 세울 건가, 그게 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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