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벳 장갑 낀 강철 주먹’을 정용진에게 판 남자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2022. 10. 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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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미국 내파밸리 셰이퍼 와이너리
세계 최고로 키워낸 더그 셰이퍼
미국 내파밸리 ‘셰이퍼 빈야드’를 신세계에 매각한 더그 셰이퍼는 “올해는 긴 가뭄으로 포도 수확량이 줄었지만, 다행히 품질은 뛰어나 맛있는 와인을 만들 수 있을 듯하다”고 했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벨벳 장갑을 낀 강철 주먹.”

미국 내파밸리 셰이퍼(Shafer) 와인은 이런 수식어가 종종 따라붙는다.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을 때 과일·초콜릿 풍미와 섬세한 탄닌이 벨벳처럼 입안을 감싸면서도, 장기 숙성을 거뜬하게 견뎌낼 쇠주먹 같은 견고함을 겸비했기 때문이다. 세계 와인 시장을 쥐락펴락하던 미국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셰이퍼 와인에 대해 “경이롭다.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이 다다를 수 있는 최상의 맛”이란 극찬과 함께 한 번도 어려운 100점 만점을 여섯 차례나 주었다. 셰이퍼의 최상급 와인 ‘힐사이드 실렉트 카베르네 소비뇽’은 병당 80만원을 호가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와인을 생산하는 ‘셰이퍼 빈야드’가 지난 2월 신세계그룹에 2억5000만달러(약 3000억원)에 매각됐다. 신세계의 셰이퍼 인수는 전 세계 주류업계에서 화제가 됐다. 와이너리가 투자처로 떠오르면서 프랑스 부르고뉴·보르도나 내파밸리처럼 유명 와인 산지 포도밭 가격이 급등하고 있으며, 특히 셰이퍼처럼 세계적으로 위상이 높은 와이너리는 돈이 있어도 사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세계는 어떻게 셰이퍼를 인수할 수 있었을까.

지난달 22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만난 더그 셰이퍼(66)는 “셰이퍼를 신세계에 매각하기로 결정한 건 두 회사가 ‘최고의 품질 추구’라는 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이라며 “신세계가 셰이퍼의 새로운 장(章)을 어떻게 펼칠지 기대된다”고 했다. 셰이퍼는 와이너리 매각 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는 아버지 고(故) 존 셰이퍼와 함께 셰이퍼를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 와인으로 키웠다.

◇실수로 탄생한 최고의 와인

존 셰이퍼는 1972년 내파밸리의 오래된 와이너리를 사들였다. 그는 시카고에 있는 교육 전문 출판업체 ‘스콧 포어스먼’에서 부사장까지 지낸 기업인 출신으로, 와인 양조나 포도 재배는 고사하고 농사 한번 지어본 적 없었다.

-아버지가 와인 애호가였나.

“와인을 즐기긴커녕 마시지도 않았다. 위스키와 맥주를 마셨다.”

-와인을 좋아하지 않고 농사도 문외한인데 왜 와이너리를 샀을까.

“아버지는 포도원을 유망한 투자처로 봤다. 아버지가 당시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서 발간한 투자 보고서를 읽었는데, 거기서 와이너리를 미래 투자 아이템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원래는 8~10년 남에게 임대했다가 은퇴 후 취미로 농사를 지으려 했지만, 내파밸리를 몇 번 방문한 뒤로 직접 포도 농사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평생 대도시에서 살아온 남자가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시카고에 있는 친인척과 친구 모두 ‘미친 짓’이라고 말렸다. 당시 아버지는 20여 년간 일해온 출판업을 떠나 제2의 인생을 개척하려고 모색하던 시기였다. 평생 양복 차림으로 전철 타고 출근하던 아버지는 ‘내파밸리 사람들이 청바지에 트랙터 타고 출퇴근하며 자연 속에서 일하는 게 좋아 보였다’고 했다.”

셰이퍼는 와이너리 매입 다음 해인 1973년 온 가족을 이끌고 내파밸리로 이주했다. 그는 47세, 아들 더그 셰이퍼는 17세였다.

'셰이퍼 빈야드' 창업자 고(故) 존 셰이퍼./신세계L&B

-어머니가 반대하진 않았나.

“언젠가 아버지에게 ‘모든 걸 버리고 내파밸리로 와서 포도 키우고 와인 만들 용기를 내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네가 누구한테 진짜 감사해야 하는 줄 아니? 네 엄마야. 엄마가 내 결정을 지지하고 따라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내파밸리에 오지 못했을 거야’라고 했다. 아버지만큼 어머니도 용감한 분이었다.”

-시카고를 떠나기 싫진 않았나.

“솔직히 말하면 신났다. 당시 미국 중부 시카고에 사는 청소년들에게 캘리포니아는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바닷가에 야자나무, 서핑, 미녀가 있는 ‘쿨(cool)’한 곳이었다. 거길 간다니, 일종의 모험처럼 여겨졌다. 문제는 내파밸리가 맬리부(부유층이 모여 사는 캘리포니아 해변 도시)와 매우 다른 시골이란 걸 몰랐다는 점이다.”

-내파밸리의 첫인상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1973년 1월 온 가족이 시카고에서 서쪽으로 2000마일(약 3200km)을 2박 3일 운전해 내파밸리에 도착했다. 시카고의 겨울은 혹독하게 춥다. 내파밸리는 따뜻했다. 주변 언덕은 온통 선명한 초록빛, 하늘은 지금 여기 서울의 가을처럼 청명했다. 밭에는 죽은 것처럼 보이는 가느다란 나무 줄기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아버지는 ‘저게 포도나무’라며 가리켰다. ‘포도는 어디 있나요?’ 묻자, 아버지가 ‘지금은 겨울이라 아무것도 없지만, 곧 잎이 나오고 포도가 맺힐 거야’라고 알려주셨다.”

-오랫동안 팔리지 않던 포도밭이라고.

“그때만 해도 산비탈에 있는 포도밭은 인기 없었다. 평지보다 농사 짓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도밭 구입 전 포도와 와인에 대해 자료를 조사하던 아버지는 지중해 일대에서는 오래전부터 산비탈이 와인을 위한 포도 재배에 최적으로 평가받음을 알게 됐다. ‘바쿠스는 언덕을 사랑한다(Bacchus amat colles)’는 라틴어 표현이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전해 내려올 정도다.”

존 셰이퍼는 낮에는 오랫동안 방치됐던 밭을 되살려내는 작업을 했고, 밤에는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를 공부했다. 인근 UC데이비스 대학에서 와인 양조 세미나를 듣기도 했다. 더그 셰이퍼도 주말이면 형제들과 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등 아버지를 도왔다.

존 셰이퍼는 차츰 자신의 포도밭 토양과 지형, 기후에는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이 최적임을 알게 됐다. 아무렇게나 심겨 있는 오래된 포도나무를 뽑아내고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으로 교체했다. 포도를 재배해 와인 업체에 팔기만 했던 셰이퍼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건 와인을 생산하기로 결심했다. 1978년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을 2년여 숙성 기간을 거쳐 1981년 처음 선보였다.

-와인을 출시한 첫해부터 호평받은 게 ‘실수’ 덕분이었다고.

“초보 와인 메이커였던 아버지는 포도를 딸 일꾼을 미리 구하지 못했다. 포도 수확이 당시 기준보다 크게 늦어졌다. 아버지는 포도 농사를 망쳤다고 생각했고,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다. 하지만 늦게 수확했기에 포도가 더 많이, 더 당도 높게 익었다. 셰이퍼 와인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풍성한 과일·초콜릿 풍미와 비단처럼 매끄러운 탄닌을 가진 와인이 탄생했다.”

◇“신세계가 펼칠 셰이퍼 미래 기대”

고등학교를 졸업한 더그 셰이퍼는 와인 양조로 이름 난 UC데이비스로 진학해 포도 재배를 전공하면서 와인 양조도 배웠지만, 졸업 후 애리조나의 중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는 “2년간 중2 학생들을 다루고 나니, 와인 업계 누구를 만나도 힘들지 않더라”며 웃었다.

-교사가 된 이유는.

“젊었고, 이상주의적이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서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를 공부하면서 교원 자격증도 땄다. 하지만 교사 생활을 통해 세상을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열정이 식으면서 와인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셰이퍼 빈야드로 바로 가지 않고 다른 와이너리에서 일했다.

“애리조나에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파밸리로 돌아가요’ 했더니, 아버지는 ‘네가 일할 자리가 우리 와이너리엔 없다’고 했다. 솔직히 아버지 밑에서 일하고 싶진 않았지만, 아버지가 먼저 거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웃음). 다른 와이너리에서 보조로 2~3년 일했고, 1983년 셰이퍼에서 일하던 와인 메이커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면서 비로소 합류했다.”

-어떤 와인을 추구하나.

“맛있는 와인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마시건 ‘와, 맛있어요’ 감탄할 수 있는 와인이다. 화려한 수식어나 어려운 용어로 왜 맛있고 훌륭한지 설명할 필요가 없는, 직관적이고 본능적으로 맛있는 와인이 최고라고 본다.”

-포도밭에 양 떼를 풀어 제초제를 대신하고, 쥐를 잡으려고 덫이나 독약을 쓰는 대신 매·올빼미 등 맹금류가 서식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등 친환경 농법을 실천하는 이유는.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그런다. 화학물질이 토양과 지하수에 스며들면 자연과 동물, 결국엔 인간에게 해로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셰이퍼의 최상급 와인 ‘힐사이드 셀렉트’./신세계L&B

-셰이퍼를 요즘 유행하는 내추럴 와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와인 업계에서는 지난 수십 년간 와인을 이렇게도 부르고 저렇게도 불러왔다. 셰이퍼는 내추럴 와인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지속 가능한(sustainable) 와인’이라 하고 싶다.”

-셰이퍼 빈야드를 올해 초 신세계그룹에 매각했다.

“셰이퍼 가문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었다. 가족 구성원 모두 매각을 100% 지지했고, 매각이 결정됐을 때 기뻐했다.”

-와이너리를 이어받길 원한 자녀는 없었나.

“다섯 자녀 모두 만족해하며 각자의 일을 하고 있다. 와인 업계에 종사하는 자녀는 없다.”

-왜 신세계였나.

“서로 잘 맞는 짝이라고 봤다. 지난 6개월여간 신세계가 새 주인으로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지켜봤다. 내 안목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신세계와 셰이퍼 둘 다 품질을 무엇보다 우선시한다. ‘이제 우리가 주인이니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신세계는 그러지 않았다. 종전 방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감사하게도 직원도 한 명도 자르지 않고 고스란히 승계했다. ‘와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니, 하던 대로 그대로 해달라’며 ‘더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도록 힘을 합쳐 보자’고 했다.”

-당신은 와이너리에서 완전히 손 떼는 건가.

“고문으로서, 이사회 구성원으로서 그동안의 경험을 나누고 이런저런 결정에 도움 될만한 조언을 하려 한다. 개인적으로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에 더 관심과 노력을 쏟으려 한다. 아내, 손주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골프에 빠지진 않을 것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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