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집에 갇힌 아이들
“엄마, 봐! 여기는 사람이 신호등이야!” 몇 해 전 외국 시골 도시에 살 때 다섯 살 아이가 했던 말이다. 거주민들이 대부분 백인인 그곳에서 아이와 산책을 나가면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곤 했다. 인종차별에 대한 내 우려와 달리, 아이와의 동행은 곳곳에서 우선적 배려를 받았다. 무엇보다 길을 건널 때 아이가 있으면 모든 차들이 어김없이 멈춰 아이가 길을 다 건널 때까지 기다려줬다. 모든 보행자들에 대한 일반적 행동이었다. 아이는 이게 신기했나보다. 어느 날 아이는 차도 가장자리에 발을 대더니 오던 차가 멈추자, 나를 보며 “여기는 사람이 신호등”이라고 자신이 발견한 낯선 땅에 작동하는 규칙을 표현했다. 또 다른 날엔 아이를 데리고 차로 이동하다가 길을 잃었다. 제대로 차선을 옮기지 못해 허둥대고 있는데 지나가던 차 한 대가 멈췄다. 곧이어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제대로 차선을 잡고 이동할 때까지 뒤차들을 잡아주었다. 왠지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났다.
이러한 행동을 아일랜드 사회학자 캐서린 린치는 ‘3차 돌봄’으로 표현한다. 1차 돌봄은 가족과 연인 사이의 ‘사랑 노동’으로, 2차 돌봄은 친구나 직장 동료 사이의 ‘우정 노동’으로 실현된다. 1·2차 돌봄이 가까운 사람들 간의 친밀한 행위라면, 3차 돌봄은 모르는 타인에 대한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연대 행위로 자원봉사, 세금 내기, 후원하기 등 다양한 형태로 실현된다. 이러한 돌봄은 우리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생존은 홀로 만들 수 없기에, 우리는 서로의 생존을 지지할 책임을 공유하며, 이를 통해 공동체 일원으로 성장한다.
한국에서 아이와의 동행은 항상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아이가 다칠까봐,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조심해”와 “미안합니다”를 입에 달고 산다. 이러한 긴장은 치매 노인이나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을 돌보는 분들도 공유하는 감각일 것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지금도 여전하다. 대부분의 공공시설에서 아이와의 동행은 경계와 감시의 시선을 받는다.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알리는 시선들을 피해 우리는 되도록 집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집이라는 일종의 감옥에 갇혀 사는 듯하다. 외국 시골 도시에서 받았던 작은 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그곳에서 타인에게 받은 돌봄은 우리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다양한 공간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몸으로 느끼게 해줬다. 이러한 돌봄의 빚을 나는 또 다른 타인을 위한 돌봄을 행함으로써 갚으려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과학과 데이터에 기반한” 저출생 대책을 요구했다고 한다. 올해 2분기 한국 출생률이 0.75명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대한 반응이다. 세계 출생률 현황 기사에 달린 한 댓글이 눈에 띈다. “대한민국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전쟁 중인가?” 실제 한국전쟁 때보다도 신생아 수가 훨씬 밑돈다고 한다. 돌봄관계는 흔히 이상화되지만, 실제 돌봄은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불균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사랑과 폭력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다. 돌보는 사람은 타인의 삶을 지원하기도, 파괴하기도 한다. 몇십 년간 심화된 2·3차 돌봄의 붕괴는 1차 돌봄에 대한 과도한 부담으로 떨어진다. “믿을 건 가족뿐이다.” 이러한 부담은 간혹 빈곤 가정의 ‘자녀 살해 후 자살’과 같은 극단적 폭력으로 이어진다.
며칠 전 윤 대통령이 어린이집을 방문해 “어린 영·유아는 집에만 있는 줄 았았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현실을 모른다는 비판을 받지만 어쩌면 이게 현실인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은 집에만 머물거나, 또 다른 집인 어린이집과 학원에 갇혀 있다. 해답은 “데이터와 과학”에 있지 않다.
채석진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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