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안 받아줘 죽였다고? 잘못된 가부장제는 이제 그만"

곽아람 기자 2022. 10. 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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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대 석좌교수 스리니바산
"가부장제 지배를 받아온 남성들, 추파 던지기와 괴롭힘 구별 못 해
자신에겐 섹스할 권리가 있는데 여성이 박탈했다며 격분하기도"

섹스할 권리

아미아 스리니바산 지음|김수민 옮김|창비|392쪽|2만2000원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

리처드 테일러 지음|공민희 옮김|RHK|432쪽|1만9800원

“(지금 내게) 국민의 시선과 언론 보도가 집중돼 있다. 시간이 지나면 누그러지길 원한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피의자 전주환의 발언이 대중의 공분을 사며 소셜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전주환은 지난달 29일 피해자 보복 살인 전 저지른 스토킹 및 불법 촬영 혐의 등에 대한 1심 선고 재판에서 “선고 기일을 미뤄 달라”고 요청했다.

성범죄 가해자가 뉘우치는 기색 없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런 남성들은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의 진실도, 자신이 끼친 피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이 부인하는 건 자신이 처벌받아 마땅하다는 점이다.” 아미아 스리니바산(37)은 2021년 낸 저서 ‘섹스할 권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스리니바산은 옥스퍼드대 석좌교수로 정치철학·페미니즘 연구자다. 성별뿐 아니라 인종 및 사회 계층 등 다층적 렌즈로 페미니즘을 바라본다.

그는 에세이 여섯 편을 엮은 이 책에서 배우 케빈 스페이시 등이 ‘미투’로 고발당한 후 자숙 기간만 잠시 거치고 곧 왕성한 활동을 펼친 사례를 들며 말한다. “남성들에게 적용되던 규칙이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한때 일반적으로 용인되던 행동에 대해 처벌받을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생각은 ‘미투’ 사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생각에는, 남성들이 최근까지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다수가 플러팅(추파 던지기)과 괴롭힘, 교태와 거절, 섹스와 강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옛날엔 문제없던 일에 요즘 여자들은 예민하게 군다’고 생각하는 건 일부 한국 남성들도 마찬가지. 신당역 사건을 두고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 폭력적 대응을 했다”고 한 더불어민주당 이상훈 서울시 의원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29일 서울 신당역 내 ‘신당역 스토킹 사건’ 피해자 추모 공간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피켓이 놓여 있다. 피의자 전주환은 이날 “국민의 시선과 언론 보도가 시간이 지나면 누그러지길 원하니 선고 기일을 미뤄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뉴스1

“2014년 5월 23일, 스물두 살의 대학 중퇴자 엘리엇 로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셀(incel)이 되었다.” 스리니바산은 책의 표제작 ‘섹스할 권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인셀’은 ‘비자발적 독신주의자(involuntary celibate)’의 줄인 말. 대개 자신에게 섹스할 권리가 있는데 여성들이 이를 박탈했다고 생각하며 격분하는 부류의 성 경험 없는 남성을 지칭한다. 로저는 친구인 남성 세 명을 칼로 찔러 살해한 후 캘리포니아대 샌타바버라(UCSB) 캠퍼스 인근 여학생 사교 클럽으로 차를 몰고 가 여성 세 명을 총으로 쏘아 두 명을 살해했다. UCSB 남학생 한 명을 추가 살해한 후 자살했다. 그는 범행 직전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서 말했다. “나는 세상과 어울리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쫓겨나고 거부당했으며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 여자라는 인간 종이 내 가치를 볼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셀’ 커뮤니티는 여성 및 여성과 잠자리를 하는 ‘비인셀(noncel)’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강간을 지지하기까지 하는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다. 미국판 ‘일베’인 셈. 엘리엇 로저 사건 직후 인셀들은 온라인 게시판에 “여성과 페미니즘이 이 사건에 책임이 있다. 그 ‘못된 년들’ 중 한 명이 로저와 성관계만 해 줬어도 그는 누구도 죽일 필요가 없었다”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구애를 거절당한 남성이 상대 여성을 살해하는 건 흔한 범죄다. 살인자의 범행 동기와 심리를 연구하는 영국 법정신의학자 리처드 테일러의 책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은 한 챕터를 ‘연인을 죽인 남자들’에 할애한다. 다양한 임상 사례를 통해 스토킹 범죄를 분석한다. “관계가 끝날 때 이런 사건이 종종 벌어진다. 배신, 신뢰 상실, 분개, 질투, 시기의 감정이 화와 분노로 이어진다. 스토킹 분야 세계적인 권위자인 폴 멀렌 교수는 이를 ‘사랑의 병적인 확장’이라고 불렀다.”

연인에게 결별을 선언한 후 해코지당하지 않고 ‘안전 이별’할 수 있을까 우려하는 여성들이 유난스럽다 생각하는가? 테일러는 “전 여친에게 거절당한 인물이 스토커 중 폭력 성향이 가장 높다”면서 “전 남친이 2주 이상 성가시게 한다면 괴롭힘이 6개월 이상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원치 않는 꽃을 전 남친에게 받았다면, 당신은 살인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테일러는 ‘안전 이별’의 구체적인 지침도 조언한다. 분명한 메시지와 함께 깔끔하게 헤어지라. 새 애인이 생겼다고 거짓말해 빠져나오려는 건 질투심에 불을 지피는 행위니 지양하라….

신당역 사건 이후 스토킹 범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대통령도 법무부 장관도 각종 대책을 내놓는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상당수가 미봉책으로 그칠 것이며 대중은 곧 잊어버릴 것이다. 스토킹에 대한 여성의 공포를 가볍게 취급했던 사회의 각성을 바라며 이 책들을 권한다. 스리니바산은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철학이나 이론이 아니며 심지어 관점도 아니다. 세상을 몰라보게 바꿔 놓는 정치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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