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 신의 이름을 오용하는 이들
러시아발 위기가 심각하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남지역을 합병하기 위한 주민투표가 진행되었다. 러시아는 주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고 선언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그 투표가 적법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며 합병 계획을 철회해야 한다고 말한다. 러시아는 그러나 그런 우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만약 그 지역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공격이 있다면 그것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핵무기도 사용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지역 전문가들은 그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닐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러시아는 이미 예비군 동원령을 내렸고 전쟁에 나설 의사가 없는 이들은 징집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의 이주를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발트해를 통해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이 어떤 인위적인 타격에 의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직 그 공격의 주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사보타주가 아닌가 의심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유럽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유럽의 기간시설을 고의로 훼손했다는 것이다. 겨울철을 앞두고 에너지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있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사건은 유럽인들에게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주고 있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사람들의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평화를 향한 인류의 꿈이 또다시 위기에 처했다. 유사 이래 갈등과 분쟁이 없는 시기는 없었지만 기후재앙이라는 폭풍이 생태계 전체를 휩쓸고 있는 이때, 또 다른 폭풍이 커가고 있는 형국이다. 퍼펙트스톰이 다가온다. 종교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가리산지리산 지향을 잃고 방황하는 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는 설교를 통해 러시아 젊은이들에게 용맹하게 전쟁터로 가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라면서 병역 의무를 수행하다 죽는 것은 타인을 위한 희생이기에 천국에서 영광과 영생을 누린다고 말했다. 조국을 위한 희생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다 씻을 수 있다고도 했다. 그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타락한 서방세계와 맞서는 러시아의 신성한 전쟁이고, 신성한 질서를 해치는 적들에 맞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신에 대한 사랑이다.
권력욕망에 사로잡힌 정치와 종교가 손을 잡을 때 세상은 위험해진다. 욕망에 신성의 광휘를 덧입히는 것은 모든 제국주의자들의 전략이 아니던가? 고대 로마제국의 첫 번째 황제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위대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티누스’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사람들은 그를 지중해를 내해로 거느린 대제국을 지배하는 자라는 뜻에서 ‘주’라고 불렀다. ‘위대한 자’에서 ‘주’로 격상되었을 때 로마제국은 또 다른 신화를 만들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 아티아는 인간이지만 아버지는 태양신 아폴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로마는 신의 국가가 된 셈이다. 권력자가 신성의 광휘를 쓴 세계에서 개인의 존엄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대의에 종속될 뿐이다. 인간 소외는 그렇게 발생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는, 자기는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가까이 있는 이들을 아끼지 않는 한 귀부인에게 어느 의사가 한 말을 들려준다. 그는 자기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더라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관념으로는 인류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가까이 있는 이들이 내게 불편함을 안겨주거나 비위에 맞지 않으면 그를 증오하는 것이 인간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개별적 인간을 증오하면 할수록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은 한층 불타오르게 되는 역설을 그들의 입을 빌려 전하려 했던 것이다. 진실한 사랑은 노동과 인내를 요구한다.
외부 누군가를 적으로 삼고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신성한 의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신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다. 자기 욕망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신의 뜻을 운위하고 신이 자기 편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위험으로 내몰면서 자기들은 안전한 자리에 머물곤 한다. 개별자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는,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어둠을 찢고 빛을 낳으려는 이들이 연대할 때 새로운 희망의 싹이 인정의 폐허 속에서 움터 나올 것이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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