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포도 10송이의 꿈

서정민 입력 2022. 10. 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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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 문화선임기자
2019년 칠레와인 ‘몬테스’의 창업주 아우렐리오 몬테스를 만났을 때 들은 이야기다. 당시 71세였던 그는 “1년 전부터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며 마냥 들떠 있었다. 파타고니아 지역 칠로에 군도의 섬 한 곳에 포도밭을 하나 장만했다는 것. 남아메리카 최남단에 위치한 파타고니아는 남극에 가까운 고위도 지역이라 상당히 춥고 습하다. 몬테스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포도가 자랄 수 없는 환경이지만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이 지역 기후가 점차 따뜻해지고 있다”며 “2헥타르(ha)의 포도밭에 6종의 화이트 와인 품종과 1종의 레드 와인 품종을 심었다”고 했다. 몬테스가 이 포도밭에서 거둔 첫 수확량은 겨우 포도 10송이였다고 한다. 인터뷰 당시 그는 “그해 수확한 포도를 직원이 배낭 하나에 넣어서 왔길래 꽉 안아줬다”며 웃었다.

2016년에 스페인와인 ‘토레스’의 5대손 미구엘 토레스 회장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140년의 역사를 가진 토레스 와이너리에선 수익의 95%를 와이너리에 재투자하는데, 특히 재생에너지 연구개발(R&D)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하고, 포도 수확 시 버려지는 가지들을 태워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 또 포도밭 외 개인 사유지에 지속적으로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고 있는데 모두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다”라는 게 토레스 회장의 설명이었다.

「 ‘파타고니아’ 진정성에 박수 보내는 시대
기념비적 실적보다, 자연과 공존 고민을

당시만 해도 ‘떼루아(포도 생산에 영향을 주는 토양·기후 등의 조건)’가 중요한 와이너리들이니 기후변화에 예민한 건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이들의 실험적 시도를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업가적 ‘혁신’으로만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는 절박함에서 나온 자구책이었다.

현재 지구의 환경위기는 위태로움을 넘어 파국을 향해 달리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7월 17∼19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페터스베르크 기후회담에 보낸 영상메시지에서 “(전 세계적인 기후위기에 직면해) 우리는 공동대응이냐 또는 집단자살이냐,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고 했다.

지구의 파멸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전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한 미국의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 사례가 떠올랐다. 창업주 이본 쉬나드 회장과 아내, 두 자녀가 소유한 약 4조원가량의 회사 지분을 신탁회사(2%) 및 기후위기 관련 비영리단체(98%)에 기부했다는 뉴스였다. 쉬나드 회장은 이 과정에서 “이제 파타고니아의 유일한 주주는 지구”라는 말을 남겼다.

요즘 분위기로 기업이 환경보호 캠페인과 기부에 나서는 일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전 세계 많은 이들이 파타고니아의 행보에 유난히 큰 박수를 보내는 것은 이 기업이 수십 년에 걸쳐 꾸준히 환경보호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2011년 뉴욕타임스에 낸 ‘우리 재킷을 사지 말라’ 광고는 새 재킷 하나를 만들 때마다 45명이 하루 3컵씩 마실 수 있는 물이 소비되고, 탄소와 쓰레기가 배출되니, 새 옷 사기를 신중히 하라는 제안이었다. 자칫 자극적인 홍보문구로 전락할 수 있었지만, 지속가능성을 위한 연구와 노력에서 나온 ‘진정성’ 있는 조언임을 알기에 파타고니아 매니어들은 점차 늘었다. 미국 포춘지에 따르면 2011년 당시 이 광고가 나간 후 파타고니아 매출은 40% 급성장했다.

한국의 기업들에게 파타고니아 같은 ‘자이언트 스텝’을 밟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기업이 수익을 얻고 성장하기 위해선 소비자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한 시대가 됐다. 특히 가치관과 신념을 기준으로 제품을 선택하는 ‘미닝 아웃’ 세대를 설득시키려면 ‘경제와 환경이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는 건 최우선 원칙이어야 한다.

얼마 전 지인이 한국예술종합학교 김봉렬 건축과 교수의 말(“건축에는 기념비적 스케일과 인간적 스케일이 있다.”)을 인용해서 한 말을 옮긴다. “한국의 기업들은 이제 기념비적 실적 올리기를 멈추고, 자연과 공존하는 인간적 철학과 방법을 고민할 때다.”

서정민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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