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 '노란 셔츠의 사나이' 한명숙
한명숙은 1953년 미8군 쇼의 무대 가수로 데뷔했다. 그리고 1961년 시나리오 작가 황영빈 작사, 손석우 작곡의 '노란 셔츠의 사나이'로 레코드 가수가 됐다. 그때 가요 문화를 팝송이 점령하고 처비 체커의 '레츠 트위스트 어게인(Let's twist again)'이 유행하면서 트위스트 춤이 국민 율동이 됐다.
작곡가 손석우가 변화를 읽고 트위스트 리듬의 '노란 셔츠의 사나이'를 미8군 쇼의 팝송 가수 한명숙에게 부르게 했다. 홍콩, 일본 등 동남아에서까지 유행하고 샹송 가수 이베트 지로도 불렀다. 한국 가요가 외국에서 불린 첫 한류 음악이다. 1962년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로 영화화돼 국도극장에서 1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한명숙은 '그리운 얼굴' '우리 마을' '눈이 내리는데' '사랑의 송가' '센티멘탈 기타' 등 서정적인 노래들을 엷은 허스키로 부르며 1960년대 힘겨웠던 대중을 위로했다.
나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겨 팬들이 궁금해하는 한명숙을 1983년 7월 27일 신문에서 인터뷰했다. 그녀의 말이다. "모든 게 운명인 것 같아요. 1961년 3월 '노란 셔츠의 사나이'를 부르고 자고 나니까 스타가 됐어요. 그리고 두 달 뒤 5·16혁명이 났어요. '노란 셔츠 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하는 노래의 인물이 5·16혁명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소장이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사실이 아닌데, 그럴싸하게 들렸어요"라고 했다.
그리고 "1970년 3월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뜨고 1년 사이에 또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충격으로 3년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전화도 못 받고 노래도 못 했지요. 13년을 집에서 아이들 키우며 살았어요. 큰딸은 국방부장관을 지낸 신성모 씨의 손자며느리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아요. 아이들이 크니까 자기 일들이 바빠 얼굴도 못 봐요. 이제 외롭네요"라고 했다. 스치는 웃음이 무척 쓸쓸했다.
내가 로스앤젤레스에 취재를 갔을 때였다. 미주한국일보에 난 기사를 보고 한명숙이 찾아왔다. 그런데 커피 한잔도 못 하고 헤어졌다.
최근 수원의 한 요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의 일이 무겁게 떠올랐다. 얼마 전 미국에 사는 딸이 다녀갔다고 한다. 한명숙은 자신의 노래처럼 맑고 정겨운 사람이다. 그래서 아프다는 소식이 더욱 아프게 들려온다. 세월은 늘 야속하다.
[신대남 전 일간스포츠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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