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장뤼크 고다르의 죽음을 택할 권리

입력 2022. 9. 30.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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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존엄사를 선택한 고다르
삶을 완벽히 통제해 마무리한 그
마지막까지 세상에 메시지 던져
자신이 만든 영화처럼 '내 멋대로'

어느 날 ‘나’는 자신을 변호사라고 소개하는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받는다. 꽤 긴 연애 끝에 결혼 8년 차에 이른 ‘나’는 잦은 의견충돌 끝에 서로 침묵하기로 합의한 아내가 드디어 이혼 전문 변호사를 고용했다고 생각한다. 이 여자가 이번에는 정말 해볼 생각인가 보군, 하고. 그러나 그가 내뱉은 이름은 아내가 아니라 이모다. 이모가 그에게 아직은 증여의 방식이지만 곧 유산이 될 돈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아직 살아있는 이모가 유산을 남길 수 있는가. 정영수의 단편 ‘더 인간적인 말’(<내일의 연인들>, 문학동네, 2020)은 이 불가능한 말의 가능성을 탐문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곧 이모가 “스위스에 가서 존엄성을 지킨 채 안락하게 죽는 것” 그 일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젊은 시절 카나리아제도에서 평생 쓸 만큼의 돈을 번 뒤 귀국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이 비교적 조용하고 안온하게 살아온 이모는 큰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우울증도 아닌데 ‘그 일’을 선택하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말려야 할까, 그대로 따라야 할까.
신수정 명지대 교수 문학평론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이 소설을 접하게 된 나는 그 당시엔 이 질문이 그다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신부전으로 고생하는 반려묘 ‘복순이’에게 고통 없는 완벽한 삶을 선사하기 위해 안락사를 선택한 이모의 결정이 자신의 실존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어떻게 죽을지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고, 누구든 그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마냥 지지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무엇보다도 이 질문 자체가 지나치게 허구적으로 느껴졌던 것도 같다.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을 감행하는 인물을 곧 만나게 될 줄을.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대표 주자, 장뤼크 고다르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그가 여생을 보내던 스위스의 법이 허용하는 의학적 도움을 받아 죽음을 선택했다고 한다. 다수의 언론은 이를 조력 자살이라고 보도했다. 조력 자살은 의사가 처방한 약물을 환자가 직접 복용해 죽음에 이르는 적극적인 존엄사를 말한단다. 고다르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평화로운 죽음을 맞았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지기를 원했다. 그것은 그의 결정이고 그렇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그에겐 중요했던 것이다. SBS 뉴스 이주형 기자는 이를 그가 마지막까지 세상에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 정치적 행위로 해석하기도 한다. 자신의 영화처럼. 내 멋대로. 숨의 끝까지.

나로선 그의 부고를 듣는 순간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미 88세의 노년에 이른 아녜스가 (마치 젊은 날의 고다르처럼 검정 선글라스를 쓴) 포토그래퍼 JR과 함께 일반인들을 촬영하고 그것을 바로 현상해서 그들의 집 벽에 거는 작업을 행하다가 마침내 고다르의 집에 이른다. 그러나 이미 긴 은둔에 접어든 그는 한사코 그녀와의 대면을 거부한다. 친구이자 한때 절친했던 영화적 동료의 침묵을 확인한 아녜스는 고다르의 집 문 앞에 주저앉고야 만다! 그때 그녀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나이, 세월, 시간의 무정함, 친구의 마지막에 대한 예감?

누가 더 인간적인가. 백발과 주름을 드러낸 채 젊은 포토그래퍼와 새로운 영화적 모험을 떠나는 아녜스인가, 은둔과 존엄사로 자신의 삶을 끝까지 완벽하게 통제하고자 하는 고다르인가. 전자가 늙음으로부터의 자유와 삶의 우연성에 기댄다면, 후자는 자아를 통제할 수 없는 어떤 불가항력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강렬한 자존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듯하다. 어쩌면 우리의 젊은 작가 정영수가 소설의 마지막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이들 간의 우열을 가리려는 시도 자체가 그릇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우리는 삶을 마무리하는 두 가지 방법을 보여준 두 사람에게 경의를 표해야만 할는지도. 위대한 예술가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신수정 명지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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