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처럼 머물다가 사라지는 삶..파도처럼 부단히 움직이며 살아보려구요[은유의 책 편지]

은유 작가 2022. 9. 30.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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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버지니아 울프 지음·박희진 옮김
솔 | 332쪽 | 1만4800원

서울의 한 유명 음식점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줄은 내가 서겠다고 했죠. 설렘보단 피로감이 큰 탓에 대기표 받는 곳은 피했는데 한 번 시도해봤습니다. 그날 따라 신선한 해산물 찜을 먹고 싶기도 했고요. 실은 저의 소소한 결심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안 하던 일 해보기. ‘줄 서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 돼’라고 무심코 말하지 않기 위해 경험을 해 본 겁니다.

30분 후쯤 입장했죠. 음식점 내부는 왁자했고 테이블이 열차 좌석처럼 붙어 있어서 어쩐지 합석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는데요, 양옆 자리 말소리를 뚫고 저희도 안부를 나누었습니다. “뭐하다 왔어?” “책 보다가.” “무슨 책?” “버지니아 울프 소설. 근데 어렵네.” “버지니아 울프가 소설도 썼어? 난 ‘자기만의 방’밖에 모르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소설을 9편이나 썼다고, 근데 ‘비운의 여류작가’라는 평면적인 이미지로 소비되는 바람에 정작 소설 작품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그래서 너도 몰랐을 거라고요.

저도 뒤늦게 한 편씩 챙겨 보고 있습니다. <올랜도>도 쉽지는 않았는데 <파도> 같은 소설은 또 처음이거든요. 중심 서사랄 게 없고 등장인물의 내적 독백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소설이라기보다 대서사시나 희곡에 가깝습니다. 활자들이 마치 파도의 포말처럼 계속 부서진다는 저의 푸념에, 친구가 아니 힘든 걸 왜 굳이 읽느냐고 묻길래 그랬습니다. 안 읽히는 책을 읽어보는 중이라고요.

때 아닌 결심주의자가 된 심경을 터놓고 싶었으나 우측 자리 소음이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테이블엔 빈 소주병이 늘었고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 얼굴은 이미 붉은 노을이고, 억양이 강한 사투리는 쩌렁쩌렁 울렸죠. 대화 불능 상황이 되자 저는 소심하게 힐끔거리며 한숨과 짜증을 삼키고 있었는데 친구가 나섰습니다.

“저기요. 목소리가 너무 커서 저희가 말소리가 안 들리거든요. 조금만 줄여주세요.” “아, 네...” 옆 테이블은 바로 잠잠해졌습니다. 순간 친구가 용감한 시민으로 보였죠. 건전한 술집 문화 창달의 선구자! 친구한테 너 멋지다고 했더니 “나도 자주 취하는 사람으로서 저분을 비난은 못한다”며 웃더군요. “너도 만취 되면 목소리가 저렇게까지 커져?” (예전에 잔뜩 취해 춤추는 건 봤습니다만) “모르지. 취했는데.” 타인을 비난하지 않고 할 말을 할 수 있는 친구가 좋아서, 오래 본 사이라도 아직도 모르는 친구의 모습이 있다는 사실이 신나서 저는 웃음이 막 났습니다.

<파도>는 주인공 6명의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시간의 폭을 담아내며 ‘삶은 끝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제목인 ‘파도’는 덧없음과 영원성에 관한 은유겠지요. “이 우주에는 변하지 않는 것, 영속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어”라는 문장이 나오는데요, 이건 ‘본격 늙음’ 앞에 선 오십대가 된 저의 화두이기도 합니다. 내 몸 여기저기 늘어나는 통증을 겪으면서 또 주변이 아픈 사람으로 채워지면서 날마다 생각하게 되거든요. 파도처럼 머물다가 사라지는 삶에 대해, 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

2차로 자리를 옮긴 우리의 대화는 노화와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죽은 엄마들을 그리워하고 병든 아버지들을 연민하다 한탄했죠. 운전을 하다가 다쳤는데도 할 수 있다고 우기고 치매 증상이 의심되는데도 검사를 거부하는 등 어르신들이 하나같이 당신의 쇠약해진 상태를 그러니까 몸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아서 자식을 속터지게 하는 겁니다.

“우리도 나중에 그렇게 될까? 나이가 들수록 남 얘기를 듣는 게 쉽지 않나봐. 자식 말도 안 듣고 고집불통이 되잖아.” 제 말에 친구는 앞으로 잊어먹지 않게 어디다가 써놔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써놓고 안 보면 그만이니까 니가 나한테 꼭 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갑자기 제 손을 잡았습니다. “ ‘우리 이상하게 되면 서로 충고해주자’ 그러잖아. 근데 내가 먼저 남의 말을 듣는 사람이 돼야 해. 평소에 남 얘기를 듣지 않는 사람이면 아무리 친구라도 말을 안 해주겠지. 내가 남의 말을 들을 사람이 되어 있으면 해달라고 부탁 안 해도 다 해준다. 이게 내 좌우명이야.”

<파도>의 주인공 버나드는 이런 독백을 합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딱 한 번 완전한 구를 이루는 대신 수천 번 깨진다.” 그날 친구의 말로 인해 낡은 생각이 깨지고 나은 생각이 완성되는 찰나의 기쁨을 느꼈죠. 어떻게 살아야 할까의 문제에 힌트를 얻었습니다. 콘크리트처럼 굳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말이 스며드는 고운 흙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러려면 질색하던 일도 해보고 안 읽히는 책도 읽고, 안 써 본 글도 시도하며 파도처럼 부단히 움직여야겠죠.

버지니아 울프가 딱 그랬습니다. 실험적인 소설 <파도>에 도전하며 “완전히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런 작품을 쓰는 나 자신을 매우 존경한다”고 일기에 씁니다. 버지니아 울프 같은 젊은 글을 저도 쓸 수 있을까요. “포도송이에서 포도를 떼어내듯이 떼어내어 ‘받아요, 이것이 나의 인생이오’라고 말”하는 몽상적이고 아름다운 책을 앞에 두고 친구와의 대화를 복기하며 저는 좋은 늙음을 꿈꾸고 있습니다.

은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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