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니니도 환호할 거야, 블랙핑크 '셧다운' 듣는다면

한겨레 2022. 9. 30.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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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 블랙핑크 '셧다운'
와이지엔터테인먼트 제공

드디어 나왔다. 이제 ‘세계 최정상 걸그룹’ 같은 수식어조차 필요 없는 블랙핑크의 새 앨범이 공개되었다. 8월에 맛보기로 신곡 ‘핑크 베넘’을 선보인 뒤 한달 만에 모습을 드러낸 새 앨범의 이름은 <본 핑크>. 어쩌면 <본 블랙>이라는 앨범도 나오지 않을까 싶다. 타이틀곡은 ‘셧다운’. 공개되자마자 1억이 훌쩍 넘어버린 유튜브 조회수처럼 수많은 리뷰가 쏟아지고 있으니 오늘 칼럼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 노래는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3악장 ‘라 캄파넬라’를 샘플링했다. ‘라 캄파넬라’는 이탈리아어로 ‘작은 종’이라는 뜻인데 종소리 같은 고음이 계속 연주된다고 해서 이런 부제가 붙었다고 한다. 이 곡을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곡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을 텐데 그것도 맞다. 왜일까?

리스트는 어릴 때 파가니니의 연주회를 보고 감동해 “나는 피아노 연주자로 제2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5살 때부터 평생에 걸쳐 연습곡들을 작곡하는데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피아노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12곡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함께 널리 알려진 6곡의 ‘파가니니 대연습곡’이 그런 시도의 집대성이다. 제목에 파가니니가 들어가 있지만 리스트가 만든 피아노 연습곡임에 주의하자. ‘라 캄파넬라’는 ‘파가니니 대연습곡’의 3번이다.

리스트의 연습곡들은 발표 당시 극악의 난도로 원성이 자자했다. 어느 정도로 어려웠냐면, 같은 음악가인 슈만이 ‘리스트의 대연습곡을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열명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요즘처럼 전문적인 피아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던 그 시대, 연주자로서 리스트의 실력은 묘기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왼손에 담배를 끼운 채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는 믿기 힘든 기록도 있고, 피아노에 관한 한 장인으로 칭송받는 쇼팽조차도 친구 사이였던 리스트의 연주에 감탄해 그의 실력을 훔치고 싶다고 편지에 적을 정도였다. 이런 리스트가 작정하고 만든 연습곡이니 오죽했을까.

와이지엔터테인먼트 제공

‘라 캄파넬라’는 이 중에서 가장 쉬운 축에 속한다. 악명 높은 난도를 실감하고 싶은 분들께는 ‘도깨비불’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초절기교 5번 연습곡’을 추천한다.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 아이돌급 스타가 된 18살 임윤찬의 연주 영상도 좋겠다. 그는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할 때 준결승전에서 리스트를 연주했다. ‘초절기교 연습곡 12곡’을 인터미션 없이 단숨에 몰아 치는 천재 소년의 모습은 젊은 시절의 리스트가 이랬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격정적인 연주가 한시간 넘게 이어지면서 찰랑거리는 머리칼이 점점 땀에 젖어가는 모습이 영상의 압권이다.

‘초절기교 연습곡’에 대해서는 덧붙일 말이 조금 더 있다. 리스트는 이 걸작을 그의 유일한 스승 카를 체르니에게 헌정했다. 맞다. 우리 모두 어릴 때 피아노 학원에서 배웠던 체르니 100번, 체르니 30번의 그 체르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리스트와 똑같은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운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초절기교 연습곡’이라는 제목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원래 제목을 우리말로 옮기자면 ‘초월적 연습곡’ 정도가 되겠는데 왜 초절기교라는 낯선 표현이 들어갔을까? 예상대로 일본식 표현이다. 이미 너무 오래 이렇게 불려서 이제부터라도 고쳐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리스트가 파가니니를 피아노로 재해석한 것처럼 블랙핑크는 케이팝으로 파가니니를 재해석했다. 앨범 공개 후 반응을 살펴보면, 바이올린 선율을 뒤로 빼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내세웠다는 점이 의아하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필자가 모니터 헤드폰으로 몇번을 들어봤는데 바이올린 소리가 종종 보컬과 거의 같은 위치까지 튀어나온다. 종소리처럼 명징한 원곡의 본질을 흩트리지 않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샘플링이 변주 없이 단순하게 반복된다는 불만도 있는데, 그건 특정한 리듬이나 멜로디를 계속 반복(루프, loop)하고 그 위에 랩을 싣는 올드스쿨 힙합의 특징이다. 그렇다. 이 노래는 힙합의 문법에 충실하다. 메인 보컬인 로제와 지수도 내지르는 고음을 철저히 자제하고 중저음으로 주제를 반복한다. 데뷔 앨범에 가득했던 전자음악(EDM)의 미사여구는 대거 삭제되고 그 자리에 바이올린 연주가 넘실댄다. 힙합과 클래식의 절묘한 조화라고나 할까.

파가니니와 리스트가 블랙핑크의 ‘셧다운’을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환호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 역시 블랙핑크처럼 강렬한 음악과 화려한 무대로 대중을 열광시켰던 당대의 아이돌이었으니까.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블랙핑크와 함께 즉흥연주를 펼칠지도 모르겠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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