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슬픔 속에 흐르는 잔잔한 위로의 노래

김유태 2022. 9. 30. 17:2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슬픔이 택배로 왔다 / 정호승 지음 / 창비 펴냄 / 1만1000원
대구 범어천 정호승 시비(詩碑) 앞에 앉은 2016년 정호승 시인의 모습. 대표작 `수선화에게`가 새겨져 있다. [매경DB]
속된 것들 속에서 성스러움을 찾고, 일상 속에서 미학을 발견하며 시대와 인간을 위로한 시인 정호승의 신작 시집이 출간됐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해 올해로 꼭 50년. 시로 울고 시로 숨쉰 그의 오랜 마음이 페이지마다 알알이 박힌 정금 같은 시집이다. "문학은 결사적이어야 한다"는 오래전 한 평론가의 월평을 아직도 책상에 붙이고 사는 그만의 치열함이 만져진다.

시집 제목 '슬픔이 택배로 왔다'는 22쪽에 실린 신작 시 '택배'에 담긴 문장이다. 어느 날 '나'에게 택배가 도착한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은 박스. 그 안에 '슬픔'이 담겨 있지만 포장지를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이 시는 정호승의 1978년 대표작 '슬픔이 기쁨에게'에 대한 답시로 읽히는 매력이 있다. 그는 오래전 이렇게 썼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에게 도착한 슬픔은, 바로 젊은 '나'가 보낸 그 슬픔 같다. 인간은 슬픔을 순환하는 존재임을,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 얼굴은 바로 시인 그 자신임을 정호승은 직시한다.

62쪽의 시 '타종(打鐘)'은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로 시작하는 1998년 작 '그리운 부석사'를 떠올리게 한다. 오래전 정호승 시인은 시를 통해 눈물 속에 절 하나를 지었다 부수었다. 새 시 '타종'에서 시인의 마음엔 집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 비를 피하는 종각이 한 채 서 있다. 그러나 종각에서 아무도 종을 울리지 않는다. 석가모니도 예수도 오지 않는 종각. '아무리 기다려도 나를 찾아와 종을 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가 종을 치러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힘껏 종을 쳤다.' 자기 내면을 타종한 직후에 시인의 내면은 어떻게 될까. 눈물 속의 절처럼 부수어질지, 가만히 확인해볼 만한 시다.

슬픔을 이야기하지만 절망하지 않고, 기쁨을 이야기하지만 환희하지 않는 정호승의 단호함이 만져진다. 98쪽에 담긴 시 '헌신짝'에서 그는 버려짐을 오히려 다가올 희망으로 전환한다. '버려진 기쁨'이란 표현이 특히 그렇다. '나에게는 버려진 기쁨만 있을 뿐이다. 나는 오직 버려진 기쁨에 의해 버려져도 버려진 게 아니다/ 당신은 나를 버림으로써 영원한 이별이 완성된 줄 알지만/ 나의 이별은 만남을 위한 기다림일 뿐이다.' 당신이 헌신짝이 되어 다시 만날 때, 헌신짝이었던 '나'는 이제 헌신짝이 아니게 된다.

136쪽 시 '도끼에게'는 장작에게 바치는 헌사로 읽힌다. '망설임 없이 힘껏 나를 패다오'로 시작되는 시는 '쪼개진다는 것은 나눈다는 것이다'란 중반부 문장에 이르러 드디어 시의 몸을 이룬다. '빈집이 되기 위하여 집을 떠난다'(시 '집을 떠나며'), '용서받지 못한 더러운 마음으로/ 아직 마침기도를 할 때가 아니다'(시 '마침기도')란 글귀도 비밀스럽게 열어볼 만하다.

정호승 시인은 후기에서 "썩어가는 모과 향은 모과의 영혼의 향기다. 내 육신은 늙어가도 내 영혼만은 시의 향기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해본다"고 적었다. 등단 50주년과 관련해서는 "시를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아왔을까. 어디에서 삶의 가치와 기쁨을 얻을 수 있었을까"라고 덧붙였다.

[김유태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