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자랑한 '우리 친구 원자'는 지구를 구원했나[책과 삶]

최민지 기자 2022. 9. 3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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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원자
제이콥 햄블린 지음·우동현 옮김 | 너머북스 | 488쪽 | 3만원
1953년 12월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뉴욕 국제연합 본부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 계획에 관해 연설하고 있다. 너머북스 제공
소련 원자폭탄 개발로 독점 깨진 후
미 ‘원자력 평화적 이용’ 발표
냉전시대 지형 끌고가기 전략
가난 탈출 절박한 신생국 끌어들여
기술 원조 이면에 식민·인종주의
핵에 대한 인류의 공포와 열망은
수십년 미국의 무기로 쓰여

1953년 12월8일, 미국 뉴욕의 국제연합 본부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연설이 울려 퍼졌다. 그는 이 연설을 통해 원자력에 대한 평화적 이용을 증진하고 핵물질을 국제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국제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의 연설은 이후 세 단어로 요약돼 이름 붙여졌다. 바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이다. 원자력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로 기록된 이 연설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이후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지구상의 원자력 또는 핵과 관련한 질서의 많은 것을 결정했다. 여기에는 물론 남한과 북한의 운명도 포함된다.

<저주받은 원자>는 미국이 주도하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계획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중동 등지에서 어떻게 전개됐는지 종합적으로 다룬 국제사 저작이다. 책을 쓴 사람은 제이콥 햄블린 미 오리건 주립대 역사학과 교수로, 국제적인 차원에서 과학과 기술, 환경을 연구해온 학자다. 햄블린 교수는 특히 핵역사와 환경사, 해양사 분야의 전문가로 냉전사의 전개와 냉전기 미국의 학지(學知) 형성을 환경사적 맥락에서 다뤄왔다. 그는 <저주받은 원자>를 통해 미국이 내건 ‘풍요의 약속’ 이면에 자리한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역사를 그려냈다.

책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계획의 수립 전후, 즉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국제 정세를 두루 훑으며 시작한다. 전 세계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통해 원자폭탄의 위력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1949년에는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원자력 무기 독점이 깨졌다. 냉전이 본격화하면서 핵전쟁의 공포가 세계를 사로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라는 새로운 구호를 들고나왔다. 미국은 무기 개발에만 골몰하는 소련과 달리 ‘평화’를 위해 원자력 기술을 활용한다는 대립구도를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가들에 원자력 응용 기술을 원조하며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1967년 일본의 국립방사선육종장에 방사선탑이 서 있다. 이곳에서는 식물에 대한 방사선의 효과를 연구했다. 너머북스 제공

미국의 이 같은 전략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원자력에 대한 인식 덕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원자력은 지구의 여러 문제를 해결할 옛 우화 속 ‘코누코피아’(풍요의 뿔)와 같았다. 미국은 전기 생산 외에도 식량과 물에 대한 더 손쉬운 접근, 기적과 같은 신품종인 밀과 쌀, 의료기술 등의 문제가 원자력으로 해결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렇게 보이는 데에는 여러 수단이 동원됐다. 월트 디즈니의 1956년작 <우리의 친구 원자>에서 원자력을 망망대해에서 찾은, 지구를 구원할 물질로 그린다.

이후 전개된 상황은 모두가 알고 있듯, 약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신생 독립국들은 원자력 기술을 얻기 위해 애를 썼다. 한국전쟁 직후 전력 등 각종 생산 설비가 모두 북한에 있어 곤란했던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국은 한 번에 모든 기술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고, 연구용 기술을 조금씩 전수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이란을 비롯한 중동 지역 국가들 또한 원자력을 통한 가난 탈출이 절박했다. 미국은 이 절박함을 석유 자원 확보에 이용했다. 결국 미국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가난한 국가들이 부상하는 대신 새로운 식민주의 질서를 만들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실제 IAEA를 이끄는 사무총장 자리는 이집트인 무함마드 엘바라데이(1997~2009)를 제외하면 유럽과 북미인이 차지했다. IAEA가 수집한 증거는 미국 등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군사개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도 사용된다. 원서의 제목 중 ‘저주받은(Wretched)’이라는 단어가 대표적인 탈식민주의 학자인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1961)에서 가져왔다는 것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원자의 약속은 세계를 어디로 인도했는가?’ 저자는 이 질문을 반드시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약속과 달리 가난과 질병, 식량, 기후 등은 여전히 인류가 맞서 싸워야 하는 문제로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냉전기 인류를 구원할 존재로 묘사된 원자력이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 ‘(화석 연료로부터) 지구를 지킬 에너지’로 다시금 불리고 있다.

최근 정권이 교체된 한국에서는 전 정부의 탈원전 기조에서 벗어나 친원전 정책이 펼쳐지고 있다. 원전은 과학과 기술의 문제이지만,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의 관점을 궁금해할 독자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사실 친핵도 반핵도 아니다. 여기서 제시한 관점들은 모두 역사적인 것들이다. (중략) 분명한 것은 산업 옹호자들과 미국 등 국가의 정부들이 세계인의 가장 큰 공포와 야심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평화적 원자’를 활용하고 오용하고 착취했다는 점이다.”

저주받은 원자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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