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떠나왔고, 훌쩍 5년이 흘렀다..다시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다른 삶]

이숙명 입력 2022. 9. 30. 16:02 수정 2022. 9. 30. 18:5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숙명의 '유유자적'

내가 누사프니다에 온 때는 2017년 말이다. 아직 인도네시아어 실력은 형편없다. 그 사실이 부끄러워서 현지인들이 몇 년 살았냐고 물어보면 “3년인가, 4년인가” 헷갈리는 척을 한다. 실제로 조금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5년이다. 그 햇수를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도 놀란다.

내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거실.

특별한 각오 없이 여행하듯 왔고, 특별히 돌아갈 각오가 들지 않아 계속 살았다. 그사이 섬의 많은 것이 변했다. 전기, 수도, 인터넷도 변변치 않고 도로는 온통 비포장이고 외국인 관광객은 사흘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던 곳이 스쿠버다이빙 관광지로 유명해지면서 개발 열풍을 겪었다. 다이빙숍, 리조트, 카페, 식당이 우후죽순처럼 불어나고 이민자들을 위한 외국 식료품점이 생기고 외지에 일하러 나갔던 지역 청년들은 고향에 취직하러 돌아오고 온갖 택배사들이 들어와서 못 구할 물건이 없어졌다. 코로나19 팬데믹도 그 기세를 꺾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나를 놀라게 하는 변화는 나 자신에게 벌어졌다.

집을 짓고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스스로의 못난 면을 보게 된 시간
이 섬의 많은 것이 변했지만 가장 놀라운 변화는 바로 나

때로 전쟁 같은 치열함 속 소소한 행복…이 땅 모든이에게 감사하다
내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삶도 금새 낡아버리는 것을

요즘 나는 ‘왜 나는 타인에게 더 친절하지 못한가’ 자주 고민한다. 며칠 전에는 집 주차장에 나타난 인도네시아인 무리에게 날카롭게 굴었다가 며칠을 후회했다. 내 집은 전망이 좋은 곳이고, 그 때문에 관광객이 거실에 불쑥 들이닥치곤 했다. 동네 사람들이나 인부들이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기도 한다. 최근 담장 공사를 시작하고 미완성이나마 대문을 달면서 그런 일은 확연히 줄였다. 그런데 모처럼 주차장에 낯선 사람들이 앉아 있는 걸 보니 다시 경계심이 폭발했다. 당신들 여기서 뭐하냐고 공격적으로 물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내 집과 인접한 부동산을 구매하러 온 땅 주인의 손님들이었다. “그럼 말고” 식으로 등 돌려 자리를 뜨고 보니 이주민 주제에 현지인들 무시하고 아무 데나 성질부리는 추한 외국인이 되어버렸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건 내가 외국 여행을 다니면서 만난 한국 이민자들에게 당황하거나 때로 경멸하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사과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그들은 떠났다. 그날 밤 이곳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에게 호소했다. “요새 남들에게 쉽게 짜증을 부리고 친절하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 싫다.” 그러자 친구가 힘없이 말했다. “나도 그래.”

예정보다 긴 시간과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드디어 ‘내 집’이 완공됐다. 거실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매일 달라서 질리지 않는다.

‘한 달 살기’니 어학연수니 하는 걸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외국에서 비자를 받고 집을 얻고 물건을 사고 일일이 사람들과 협상을 하면서 생활하는 피로감이 있다. 회사를 다니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더할 것이다. 나는 과거 이민자들이 지친 얼굴로 이민 생활의 고충을 토로하거나 “얘들은” “쟤들은” “걔들은”으로 시작되는 현지인 험담을 늘어놓을 때 쉽게 그들을 평가했다. ‘그럴 거면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인종차별주의자냐? 자기 나라에선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고 살았기에? 저렇게 죽상이면 있는 복도 달아날 텐데.’ 그런데 얼마 전 발리에서 20년째 살고 있다는 한국인 이민자가 “아이고, 집 하나 짓고 이 나라가 힘들어졌소? 아직 멀었네. 더 겪어보쇼”라고 할 때는 “더 겪고 싶지 않아요”라고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제 나라를 욕하던 수준으로 이국의 도시를 욕하기 시작했다는 건 그 도시에 생활인으로서 동화되었다는 증거다. 그리 생각하면 내가 타인에게 친절하지 못한 것은 결국 이곳 환경이 아니라 나 자신의 성질머리 때문이다. 처음 3년은 타지에서 내 방이라는 나만의 안전 공간에서 홀로 일한 덕에 스스로도 ‘해탈했나?’ 싶을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을 짓고, 사람들과 부대끼고, 수많은 협상을 하면서 나는 다시 자신의 못난 면들을 직시하게 되었다. 우유부단하고 성급하고 사소한 것에 발끈하고 비합리적인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쉽게 좌절하고 서운한 일이 있으면 소득 없는 앙갚음을 하려는 경향 같은 것들이 두더지처럼 수시로 튀어나왔다. 그것들을 때려잡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한 탓에 타인에게 친절할 기운이 남지 않았다. 나는 이제 이런 자신과 처음부터 다시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동남아에서 집을 짓고 디지털 노마드로 지내는 삶에 대해, 나는 아주 낭만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한동안은 나도 환경이 바뀌면 사람이 바뀐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 효과일 뿐이고, 인간은 결국 자기가 타고난 대로 살게 된다. 나는 서울 종로 반전세집에 사는 성질 고약하고 항상 피곤한 프리랜서에서 동남아 풀빌라를 가진 성질 고약하고 항상 피곤한 프리랜서가 되었을 뿐이다. 사소한 일을 계기로 이렇게 깊은 자책의 구덩이에 자신을 빠뜨리는 습성도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지면에 기고하는 동안 한 번쯤 이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분들을 종종 만났으니, 그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현실적인 조언을 드리겠다.

마지막 청소만 남은 수영장.

발리에서 생활하면 물가가 더 쌀 것 같지만 외국인은 비자 갱신 비용이 들고, 전기, 수도, 가정용 인터넷 등 어떤 필수 항목은 한국보다 비싸다. 그러니 집값만 보고 ‘한국보다 싼 나라에서 적게 일하며 여유롭게 살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가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이곳 의료 서비스 수준이 한국보다 떨어지기 때문에 불의의 사고나 질병이 발생할 경우 한국으로 돌아갈 여유 자금까지 이주 비용으로 잡아야 한다.

혹시 집을 짓게 된다면 결과물 말고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조언도 드리고 싶다. 발리에서 선진국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워 사업을 하려는 외국인들을 접하다 보면 잡지 기자 시절 아마추어 예술가들을 상대하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자기애와 자유로운 영혼과 그럴듯한 포장을 갖췄지만 막상 간단한 업무라도 주어보면 기본기도 없고 시간 감각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그러다 실력이 탄로 나겠다 싶으면 언제든 안면 바꾸고 도망칠 준비가 된 부류들 말이다. 그래도 마감은 해야 하니까 편집자들이 열과 성을 다해 수습을 해주면 그게 자기 실력이라 홍보하고 다니면서 커리어를 키우는. 한국인이라고 더 믿을 것도 없고, 현지인이라고 겁낼 것도 없다. 국적의 문제가 아니다. 그나마 믿을 건 포트폴리오와 고객 평판뿐이다.

집을 지을 때는 현지의 자연환경도 고려해야 하는데 이것도 고작 몇 년 살아본 외국인에겐 어려운 일이다. 한 친구는 우붓의 리조트들에서 영감을 얻어 거실과 욕실을 둥글둥글한 모양에다 오픈형으로 설계했는데 그 탓에 창을 달 수 없어서 우기면 집이 난장판이 되고, 외벽이 부족해 콘크리트 지붕이 주저앉을 위험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낡은 보트를 분해해서 업사이클한 대문.

나의 수영장도 골치다. 집의 전기와 배관이 하자투성이라 수영장은 또 얼마나 엉망진창일까 걱정했던 것에 비해 전선이 죽어버린 조명 두 개를 떼어내고 물 새는 구멍 하나를 막는 정도로 끝났으니 그건 다행이다. 문제는 관리다. 막연히 ‘동남아 주택의 낭만은 수영장으로 완성되는 것 아니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의외로 전기도 많이 들고 청소도 자주 해줘야 한다. 게다가 수영장 물은 한 번 담으면 약품으로 정화하고 펌프로 순환을 시켜서 좀처럼 교체할 일이 없는데 여기는 햇빛이 강하고 기온이 높아서 증발하는 물이 많다. 같이 사는 남자는 내게 “수영장 비용을 뽑으려면 네가 10년 동안 매일 하루 한 시간씩 수영을 해야 한다”고 압박 중이다. 비용도 비용인데 환경에 몹쓸 짓 한다는 죄책감이 크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내가 지금 같은 값으로 한국에선 누릴 수 없는 환경을 누리는 건 맞다. 나는 30대에 서울에서 혼자 살면서 월세와 공과금을 포함, 한 달 150만원 정도를 지출했다. 여기서도 비슷하게 지출을 한다. 대신 여기엔 수영장이 있고, 정원이 있고, 가스 오븐을 둘 만한 크기의 주방이 있고, 잡다한 물건을 몽땅 수납해서 미니멀리스트인 척할 수 있는 팬트리가 있고, 날씨는 매일 좋다.

집을 짓는 데 토지 임대, 건축, 인테리어를 포함해 7000만원이던 예산이 최종 1억2000만원 정도로 불었는데, 견적에 비해 커졌을 뿐이지 한국에서 집 짓는 비용에 비하면 큰돈은 아니다. 아파트 대출금을 갚기 위해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새벽에 깨어 일터로 나가는 성실함은 존경하지만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이 아니었다. 이 공간이 내게는 최선이었다. 남자친구는 완공 기념으로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전동공구와 스피커와 에스프레소 기계를 샀다. 그렇게 오래 그린 삶의 완성태를 하나씩 구현하면서 드는 희열이 있다.

어쩌다 한국에 가면 친구들이 쏟아내는 부동산 얘기, 주식 얘기, 정치 얘기, 회사 스트레스로 금세 초조해지고, 치열하게 살면서 계속 성장 중인 동년배들을 보며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나만 홀로 진공 상태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이 생활이 얼마나 지속될까, 혹시 서울에 돌아가게 되면 발리에 오기 전 생활 수준이라도 회복할 수 있을까. 이건 나이 때문이기도 할 터다. 20~30대 때처럼 ‘막 살다 보면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수습할 거야’라는 낙관이 들지 않는다. 그러다 ‘내 집’에 돌아오면 안정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집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모든 걸 가능케 해준 이 나라에, 이곳 사람들에게, 감사할 일만 남았다.

이곳 관광산업이 회복되고 있으니 투자해둔 리조트 계획도 진전이 있을 것이다. 그 리조트는 코로나19 때문에 완공이 2년 동안 밀리고, 투자자를 모집한 친구가 지쳐서 나가떨어지고, 건축비가 초과될 때마다 새로운 투자자를 끌어들인 바람에 사공이 많아지고, 토지 임대 계약은 짧고, 대나무로 지은 건물들은 미완인 채로 낡아버려서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최근 상황을 보다 못한 투자자 한 명이 프랑스에서 날아와 간단히라도 문을 열자고 뛰어다니고, 나도 집 공사가 얼추 끝나서 일을 거들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선 간간이 글만 쓰면서 게으르게 살 거라고 몸부림을 쳤는데 인생은 역시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휴식 같은 삶이란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이려고 한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타인과 부대껴야 하고, 일거리는 있는 게 감사하고, 그러니 더 의젓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다.

삶을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도 자신을 바꿀 순 없다. 자신이 달라지지 않으면 새로운 삶도 금세 낡아버리고 만다. 그게 누사프니다에 머문 5년 동안 내가 배운 것이었다. 나는 이제 지친 자신을 수습하고, 집을 핑계로 미뤄두었던 다음 단계의 숙제들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동안 푸념을 들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린다.

<연재 끝>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이숙명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