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생각할 때마다 샌드위치가 떠오른다

박찬일 2022. 9. 3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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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밥 먹다가 울컥'] 이탈리아 소도시에 있는 현악기 제작학교의 첫 한국인 학생은 모르타델라 샌드위치를 고집했다. 제일 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점심을 때우고 그는 실습실에서 나무와 다퉜다.
이탈리아식 소시지 딱 한 장을 낙엽처럼 끼운 모르타델라 샌드위치. ⓒ최갑수 제공

오래전 일이다. 이탈리아 중부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 제작학교를 다닌다던 ‘늙은’ 학생이었다.

“부안서 왔슈. 나이가 저보다 성님이네유.”

아내가 있다고 했다. 서울서 아내가 벌어 생활비를 송금해준다고 했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태권도 선수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에서 패션 디자인을 했단다. 어쩌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인심 사나운 이 중세도시까지 흘러들었을까.

하기야 그나 내나 피차일반이었다. 아내 뜯어서, 공부랍시고 어쨌든 이탈리아에 와 있었다. 그는 훨씬 책임감이 강했다는 게 달랐다. 빨리 배워서 아내 고생을 끝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탈리아어를 못했다. 형편없는 이탈리아어를 쓰는 내가 더러 간단한 통역을 할 정도였다.

“랭귀지 코스 같은 거 댕길 시간이 없슈. 얼른 익혀서 귀국혀야쥬.”

어떻게 입학을 했나 몰랐다. 그는 구비오(Gubbio)라는,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도시에 있는 현악기 제작학교의 첫 한국인 학생이었다.

“같이 배우러 간 부랄 친구가 있는디, 입학 면접 보는디 붙여달라구 통역을 해줬슈. 열심히 배우겠다구.”

그는 면접 보는 교장선생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굳은 의지. 그런 거 보여주는 수밖에 더 있었겠슈? 안 되면 막고 품는 거쥬.”

막고 품다. 도랑 양쪽을 흙으로 막고 물을 뺀 후 고기를 잡는 최후의 어로법을 이른다. 어떻게든 하자고 드는 절박감이기도 하다.

그는 절박하게 학교를 다녔다. 이탈리아 학생들보다 더 악기를 잘 만들었다. 그게 그의 승부수였다. 그를 보러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여전히 그는 막고 품었다.

“말은 못해두 돼유. 악기만 잘 만들믄 돼유. 그거 말구 뭐가 있간디.”

2년제 학교였다. 그는 꼴찌로 입학해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교장은 이탈리아에서도 알아주는 명장이었다. 교장이 그의 졸업 작품 바이올린을 학교 전시실에 공식 헌정했다. 솜씨를 인정한 것이었다.

학교 갈 때 그는 돈을 딱 세어서 갔다. 점심값 2유로였다. 얇게 썬 모르타델라(이탈리아식 소시지)만 딱 한 장을 낙엽처럼 끼운 샌드위치 값이었다. 싱싱한 모차렐라와 토마토, 루콜라 샌드위치도 있고 지역 명물 프로슈토 생햄을 끼운 놈도 있었지만 그는 늘 모르타델라 샌드위치였다.

“그게 젤 싸유.”

더는 묻지 못했다. 그는 물도 아마 ‘아쿠아 푸블리카’를 마셨을 것이다. 수돗물. 그건 공짜니까.

샌드위치 한 쪽으로 점심을 때우고 그는 실습실에서 나무와 다투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옛 장인과 같은 방식으로 바이올린과 첼로를 깎았다. 수제라는 명품은 그렇게 탄생한다. 도료도 접착제도 다 자연에서 얻은, 효율은 없지만 그런 미련한 재료와 제작 방식이 명품에 근접시킨다는 걸 그는 학교에서 배웠다. 과르네리, 스트라디바리우스가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악기다.

한번은, 그의 방에 들른 적이 있다. 내가 많이 아픈 날이었다. 공황장애로 혼자서 잘 수 없었다. 봄이었는데도 중부의 산악도시 구비오는 추웠다. 가스비가 아까워 불도 때지 못하는 추운 자취방에서 그가 저녁밥을 차렸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김치 한 종지, 달걀프라이가 놓인. 그날 밤 그는 불안 증세를 호소하는 나를 제 침대에 눕혔다. 물을 끓여서 생수병에 담아 건네주었다.

“추운디 꼭 껴안구 자유. 약 드시구유.”

새벽에 식어가는 생수병 대신 그의 등에 살을 붙였다. 체온이 그리도 위안이 되는 밤이었다.

한번은, 고기도 못 먹고 사는 것 같은 그를 내 방에 부른 적이 있었다. 이탈리아 녀석들 넷과 함께 쓰는 셰어하우스였다. 그 집엔 룰이 몇 가지 있었는데 거의 에너지 절약에 관한 것이었다. 부엌엔 ‘이탈리아는 가스·전기가 비싸다’ 같은 문구가 붙어 있었다.

“노 브로도, 노 브라사토!(육수 만들기, 찜 금지!)”

가스가 많이 들어가는 요리법은 피하자는 거였다(자식들아, 대마초나 안 피우면 매일 찜을 해먹겠구먼).

그런 집에 그를 불러 나 몰라라, 소갈비찜을 해주었다. 서너 시간 눈총을 받아가며. 이탈리아에서 소갈비는 아주 쌌다. 돈 만원이면 한 솥 끓이고도 남았다.

‘구비오 현악기 제작학교’의 첫 한국인 학생 박경호씨는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박경호 제공

물은 ‘아쿠아 푸블리카(수돗물)’

그는 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그는 쉼 없이 깎고 조이고 붙였다. 그가 학생 시절 만든 어느 악기에는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뜨거운 물병 값으로, 그 막막하던 날을 견디게 해준 그에게 보탠 악기 재룟값이었다. 그런 호의를 기억하는 그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옛집을 허물고 혼자되신 어머니를 위해 맨손으로 새집을 지어드렸다. 설계도도 없이 처음부터 완공까지, 나중에 준공검사 하러 온 공무원이 진짜냐고 혀를 내둘렀다는 ‘자가 완성 집’이다. 마치 스트라디바리우스를 깎듯이. 손으로 재고 나무를 켰다. 그게 집이 되었다. 그것도 이층집이. 어머니는 오래 살아보지도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다. 그는 그 후로도 20년 동안 그 집을 지키며 산다.

그의 바이올린 작품은 팔리지 않는다. 한국의 현악기 사대주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세계에선 다 아는 일. 한국인이 만든 악기는 아무리 뛰어나도 안 팔린다. 그처럼 손으로만 깎고, 최상품 재료로 만든 고급일수록 더 외면받는다.

그는 악기마다 꿋꿋하게 자기 이름을 새겨 넣는다. 배운 학교가 있는 도시 이름 ‘구비오(Gubbio)’와 ‘경호 박’이라는 한국 이름을 말이다. 최상의 소리를 내는, 과르네리와 스트라디바리우스 악기가 그의 제작소에서 세월을 얻어간다. 그는 팔리지 않는 악기를 끊임없이 만든다.

졸업 20주년 기념으로 그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홈 커밍 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의 그 학교, 공식 이름 ‘구비오 현악기 제작학교’로. 그를 아끼던 교장은 돌아가셨고, 담당 교수는 타 지역으로 떠났다고 했다. 그는 빈 실습실에 앉아 가만히 옛 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잘 산다. 공공근로 나가서 몇 푼 얻고, 시간 내어 농사도 짓는다. 한번은 그가 직접 농사를 지은 단호박이 집에 왔다. 식구들은 달고 맛있다는데 나는 손이 가지 않았다. 내가 그를 생각할 때마다 기억나는 건 모르타델라 샌드위치다. 그저 제일 싸기 때문에 지겹도록 먹었다는.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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