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트라우마와 외환건전성 집착..위기는 막아질까?

서영민 2022. 9. 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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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펀더멘털'이란 단어, 어쩌다 정부 불신의 상징 됐나?

'펀더멘털'이라는 말은 기획재정부 직원들의 뇌리에서 악령처럼 반복되는 단어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신청 직전까지 당시 경제수장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여러 차례 반복했던 말 때문이다. "한국경제는 펀더멘털(경제기초)이 튼튼하다" 10월까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11월에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정부가 '여러 재정 건전성 지표가 괜찮으니 안심하라' 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 얘기를 한다. 정부가 위기 직전까지 거짓말한다는 프레임인 셈이다. 그래서 '펀더멘털'은 때때로 시장의 정부불신을 상징하는 단어처럼 사용된다. 지금도 온라인 기사를 보면 이걸 언급하는 신랄한 댓글이 넘쳐난다.

"IMF 때도 그러지 않았냐?", "괜찮다 괜찮다 반복한 뒤에 위기가 온다", "거짓말이다"

이런 불신이 지금의 외환시장 불안의 한 구성요소일 가능성이 있다. 정부는 "현재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이는 주체는 외부의 투기 공격세력이 아니라, 국내 기업과 개인이다"라고 말했다. '내국인의 사재기'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지금 시장 불안이 '국내 심리 불안' 때문이라고 명시했다. 이 불안, 뿌리 깊은 불신과 무관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믿지 못하니 각자도생의 대비를 하는 것일 수 있다.

■ "당장 빼 쓸 돈은 4%밖에 안 된단 기사 보면 억장 무너져"
=한국 경제 관료들이 쌓은 네 가지 외환 건전성의 첨탑=

그럼에도 정부 메시지는 명확하다. 외환시장은 물론 정부의 대비에도 문제가 없다. 28일에는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김성욱 국제경제관리관(차관보)은 외환 불안을 지적하는 기사를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까지 표현하며 여러 지표가 나쁘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려 애썼다.

이런 기사가 문제라고 했다. [외환보유고에서 '외화 예치금'이 당장 빼 쓸 수 있는 돈이다. 그런데 이 돈 비율은 4.1%밖에 안된다. 그래서 걱정이다.]


김 차관보는 외환보유고가 이자 없는 예치금 형태로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했다. 이자를 연 1%만 받아도 1년에 5조 원 정도인데, 내 돈도 아닌 국민 세금을 그렇게 둬선 안 된다고 했다. 또 대부분 유가증권의 형태이지만, 유동성이 충분하다고도 했다. 애초에 국제 기준상 유동성(현금화 가능)이 있어야 외환보유고에 넣을 수 있다.

①외환보유고

다만 외환보유고 증가 속도가 2010년대 중반 이후 더뎌진 것은 사실이다. 3천5백억 달러 선에 근접한 뒤 비율로 보나 금액으로 보나 크게 늘지 않는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외환보유고를 늘리려면 달러를 사야 한다. 보통 원화 강세일 때 달러를 산다. 문제는 그러면 '환율조작국'이라는 오명을 쓸 수 있단 점이다. 한국정부가 원화 약세를 유지하려고(원화가 약세면 수출에 유리하다) 시장에 개입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안그래도 이 의심은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환율이 높은 지금 같은 상황에 달러를 살 수는 없다. 정부가 불 난 집에 휘발유를 끼얹는 꼴이 될 수 있다.)

김 차관보는 그래서 '외환보유고를 늘리는 정책'에는 한계가 있단 결론에 이르렀다고 했다. 대신 주목하는 것이 '외화 순자산'이다.

② 외화순자산

민간의 대외자산이 늘면 일본처럼 위기 시에 본국으로 돌아오는 달러 자산이 외화 건전성을 지켜주지 않을까? 해외투자 활성화를 위한 '해외 펀드 비과세' 혜택 같은 제도가 바로 이런 큰 그림 아래 시행된 제도다. 2014년 전후로 외환보유액 증가세는 둔화했지만, 민간의 대외자산 증가세가 눈에 띄게 늘었다. 대외부문의 완충 여력이라는 측면에서 변화가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③단기 채무

그래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왔다. 원인은 명확하다. 월스트리트의 탐욕이다. 부실 부동산 유동화 증권을 쪼개고 조합해서 괴상한 우량상품을 만들어내려다가 부실 부동산 버블이 터진 것이다. 대형 금융회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자 '아무도 믿을 수 없다며' 금융사들 사이에서도 서로 돈 빌려주기를 꺼리게 된 것이다. 뉴욕과 런던을 잇던 세계 금융의 가장 큰 대동맥의 순환이 멈췄다.

"그런데 왜 한국이 이 피해를 크게 보았을까?" 에 대한 의문이 기재부의 세 번째 고민이 되었다. 미국의 경제사학자 애덤투즈는 한국의 위기를 이렇게 본다.

아시아의 그 어떤 지역이나 국가도 2008년의 한국처럼 수출 불황과 환율 폭등, 유동성 위기가 종합적으로 덮친 곳은 없었다.

당시 한국이 보유하고 있던 불량 미국 모기지 증권은 8,500만 달러어치에 불과했다. 문제는 보유 자산이 아니라 대차대조표상의 자금조달 방식이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은 금융중심지로 발돋움하려 통화와 자본 흐름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한국의 은행은 세계 달러 단기 자금을 빌려와 한국 내에서 고금리로 장기간 투자했다. 수출은 호황, 원화가치는 상승... 이런 투자는 더 매력적이었다.

기업들은 투자가 아닌 환율 방어 목적으로 참전했다. 달러를 빌려와 한국 자산에 투자하고 환율이 유리해졌을 때 갚았다. 2008년, 이런 방어전략의 결과로 한국 기업이 단기로 빌려온 자금은 1,760억 달러에 이른다. 이 단기 채무가 한국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위기를 막으려 발버둥 칠수록 상황은 악화됐다. 달러화 선매입하면 기다렸다는 듯 원화는 폭락했다. 한국 외환보유고는 2,000억 달러까지 떨어졌다. 환율은 1,000원에서 1,600원이 되었다. 한국보다 심한 환율하락을 겪은 나라는 국가부도 위기에 몰렸던 아이슬란드뿐이었다. 달러화 대출 비용은 60% 넘게 상승했다. CDS프리미엄은 2007년 여름에 20bp에서 2008년 11월 700bp로 폭등했다. <붕괴> 애덤투즈 ~p371

"단기외채로 2008년 금융시장 어려움 겪고 나자 정부는 또 고민하게 된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외환보유액만 쌓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유액 말고 다른 게 중요하구나. 은행들의 단기외채 자체를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국 경제관료들은 이 새로운 위기의 재발도 막기로 했다. 그 해답이 바로 단기채무 비율규제다. 이른바 '외환 건전성 3종 세트'로 불리는 제도를 도입한다. (1) 선물환포지션 상한 (2) 외국인 채권투자 과세 (3) 외환건전성부담금이다.


실제 글로벌 금융 이후 채무 금액이나 비율이 확 줄어든 것이 보일 것이다. 동시에 이 단기 외채 관리가 2010년대 후반 이후 느슨해지는 경향도 보일 것이다. 건전성 제도가 왜 완화된 것일까?

④ LCR :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은행 단기 유동성 규제

단기외채 규제가 국제사회와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OECD는 우리나라가 2010년 도입한 ‘거시건전성 3종 세트’가 OECD의 자본자유화 규약에 위배돼 규약 ‘유보’가 불가피하다는 의사를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OECD 자본자유화 규약은 '자유로운 자본거래를 제한하는 규제나 내·외국인 차별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선물환포지션은 굉장히 강한 규제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계 은행 지점들의 영업한도를 지정하는 제도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이렇게 강력한 제도를 계속 지속해선 안 되겠단 생각으로 똑같이 민간의 자생적 역할 키워야겠다는 생각 하게되었다."

그러나 한국 경제관료들은 단기자금 규제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고, 다른 규제를 들고 나왔다. 금액 자체를 규제하는 방식에서 유동성 비율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은행 외화 유동성커버리지 비율(LCR, Liquidity Coverage Ratio)이다. 이를테면 앞으로 30일 동안 나갈 돈에 대비해서 보유하는 외화 비율 규제다. 30~40%대에서 시작한 규제가 지금은 80% 이상으로 높아졌다. '향후 24일 치 외화 수요는 반드시 들고 있으라'는 규제인데, 현재 비율은 120%다. 36일 치 외화 나갈 돈을 들고 있다.


"(LCR 규제가) 있는 나라가 없다. 외화 비율이 중요한 나라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튼 우리 LCR 규제는 또 굉장히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을 가정한다."

■ 대비 많이 했다고 위기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 금융 당국은 'IMF 펀더멘털 트라우마' 속에서 외환 건전성을 유지할 여러 방안을 지속적으로 만들고 관리해왔다. IMF 외환위기 경험으로 외환보유고를 늘렸고, 또 수출 증가와 경상수지 흑자 지속에 따라 민간 해외자산 보유의 방식으로 '이상적 비율'을 만들어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단기 차입'이라는 복병이 있단걸 알게 됐고, 단기 자금 자체를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 규제가 국제사회의 요구와 충돌하자 유동성 비율 규제로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1997년이나 2008년과 유사한 위기가 재발할 우려가 현저히 낮아진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러나 과거의 위기에 대비했다고 해서, 미래의 위기를 반드시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불신의 경험이 있는 국내 기업과 개인들은 위기 신호가 커질수록 더 달러를 사 모으고 있고, 이게 위기를 더 가중시킨다.

게다가 외화 조달시장에도 위기 감지 신호가 들려온다. 달러 스왑시장의 '스왑 베이시스' 지수가 지난주 이후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스왑 베이시스는 달러 스왑 금리(CRS)와 국내 금리(IRS) 사이의 차이를 기준으로 측정된다. 위기가 오면 이 수치가 급격히 떨어진다. 코로나 위기 때 -250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이 수치가 28일 기준 -170까지 떨어졌다. 8월 중순 이후 낙폭이 심상치 않다. (스왑 금리 지표 금리가 LIBOR에서 SOFR로 변경되어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추이는 분명히 이상 신호를 보이고 있다)


사실 올해 1월 이후 원·달러 환율은 지속적으로 올랐지만 스왑 베이시스는 안정적이었다. 외환시장 환율은 올라가도, '달러 자금 조달 시장'에서 이상 신호가 감지된 적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연준이 물가에 대한 기대를 다시 한번 크게 수정한 이후, 또 영국 위기설이 불거진 이후, 이 수치마저 흔들린다. 달러를 구하는게 좀 어려워졌다, 긴장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국제사회와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건전성에 집착하던 경제 관료들이 만든 제도가 이번 위기를 막는 방벽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경제 주체들의 불신을 딛고 경제를 지켜내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서영민 기자 (seo01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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