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과학과 만나다]⑬ 현장에 남은 향수·섬유유연제 냄새… 범인 잡는 증거된다

이학준 기자 2022. 9. 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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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현장에 남겨진 공기 포집… 분석 기술 개발 완료
사람 특유의 체취에 대한 연구 진행… 피의자 특정 용이
냄새는 과거 ’증거체취견’의 영역… 2024년 이후 증거 채택 길 열려

2020년 2월 경기 포천의 한 음식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50평 규모의 식당을 다 태우고 나서야 진압됐다. 화재 원인을 조사하던 경찰은 ‘기체분자 식별·분석 기술’을 활용하기로 했다. 화재 현장의 공기를 포집해 어떤 성분이 들어있는지 분석하는 것이다.

분석 결과 화재 현장 공기에서 등유 성분이 검출됐다. 단순한 화재로 끝날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경찰은 계획범죄에 초점을 맞춰 수사를 진행했다. 결국 경찰은 피의자를 검거하고 보험금을 타내기 위한 고의적인 방화라는 결론을 내렸다. 기체분자 분석 기술이 수사의 ‘조타수’ 역할을 한 것이다.

범죄 현장에 남겨진 공기를 분석해 피의자를 추적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현재는 화재·폭발물 감식 위주로 시범 운영되고 있지만, 개인이 가진 특유의 체취에 대한 연구가 2024년 완료되면 용의자가 범죄 현장에 있었는지 여부를 냄새로 확인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냄새가 사람의 DNA나 지문처럼 범죄의 증거가 되는 셈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경찰대학 치안정책연구소 법과학융합연구실은 최근 ‘국민위해 인자에 대응한 기체분자 식별·분석’ 기술 개발을 완료했다. 경찰청은 전국 시·도 경찰청에 공기를 포집해 보관할 수 있는 기체포집기를 1~2대씩 배포해 시범 운영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기체포집기의 성능을 확인하는 한편 관련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경찰청이 2017년부터 2024년까지 96억원을 투입하는 연구개발(R&D) 사업의 일환이다.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가 개발 완료한 기체포집기. 왼쪽이 옛날 버전, 오른쪽이 최신 버전이다. 오른쪽 중간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기체포집기가 놓인 장소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여 보관한다. 기체포집기 내 GPS가 달려 있어 공기를 포집한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이학준 기자

그렇다면 어떻게 냄새로 범인을 잡는 걸까. 핵심은 사건 현장의 공기를 포집하고 분석하는 기술에 있다. 범죄 현장이나 화재가 발생한 장소에서 과학수사요원이 기체포집기를 이용해 공기를 포집한 뒤 이를 치안정책연구소로 보내면 공기 속에 어떠한 성분이 있는지 확인한다. ‘기체 크로마토그래피’를 이용해 공기를 성분별로 분리한 뒤 질량분석기 등을 활용해 검출하는 방식이다.

경찰은 사람이 지닌 고유의 냄새를 분석해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기술까지 개발중이다. 사람에게는 DNA나 지문처럼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고유의 냄새가 있는데, 이 냄새를 구성하는 휘발성 유기화합물은 샤워를 해도 잘 지워지지 않고 사람이 머문 장소의 공기나 바닥·벽에 존재한다. 범행 장소에서 발견된 특정한 패턴의 냄새가 용의자에게서도 발견된다면 그를 피의자로 특정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냄새는 섭취하는 음식의 종류를 비롯해 사용하는 화장품·향수·비누나 일하는 공간 등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경찰은 이러한 일상생활 속 냄새도 연구하고 있다. 똑같은 섬유유연제라도 제품에 따라 냄새를 구성하는 분자의 패턴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를 데이터베이스(DB)화한다는 계획이다.

경찰은 관련 연구가 완료되면 수사에 적극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노래방·섬유공장 등 고유의 냄새를 가진 장소에서 범행이 벌어졌을 경우 범행 장소의 냄새와 용의자의 체취를 비교·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용의자가 네일아트 등 특수한 냄새에 영향을 받는 직업을 가졌다면, 범행 장소에서 이러한 냄새를 포착할 경우 피의자 특정에 활용할 수 있다.

기체포집기 상단에 끼우는 기체포집관. 포집한 공기는 이 관에 보관된다. 기체포집관을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로 보내면 공기 안에 어떤 성분이 있는지 분석한다./이학준 기자

경찰 수사에 있어 냄새는 탐지견인 ‘체취증거견’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체취증거견이 법정에서 증언을 할 수 없기에 참고사항으로만 활용됐을 뿐 공식적인 범죄 증거로 채택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2024년까지 R&D를 마치고, 관련 연구 결과가 신뢰할 만하다는 공식 인증·인정을 받게 되면 냄새가 증거로 채택될 가능성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치안정책연구소 관계자는 “어떤 사람이 특정한 공간에 있으면 사람의 땀이나 고유의 냄새가 몸에서 발산된다”며 “이번 연구는 좀 더 객관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사람을 식별하려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현재는 시범 운영을 통해 기체를 수집·분석하는 게 목적”이라며 “R&D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실증하는 단계”라고 했다. 이어 “아직 수사의 공식 프로토콜은 없다”면서도 “기체를 분석해 보니 어떠한 성분이 나오더라는 피드백을 해주면 담당자들이 참고해서 수사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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