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새로운 번역본으로 만나는 헤겔 주저 '정신현상학'

고명섭 2022. 9. 3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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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전문가 김준수 교수
기존 임석진 번역본에 도전장
서양 철학사 가장 난해한 저작
'원문에 충실한 직역'으로 승부

정신현상학 1, 2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지음, 김준수 옮김 | 아카넷 | 2만4000원~2만6000원

<정신현상학>(1807)은 독일 관념철학 거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의 청년기 마지막을 장식하는 저작이자 헤겔 철학의 첫번째 주저로 꼽히는 책이다. <정신현상학>의 한국어판은 이제까지 헤겔 전문가 임석진(1932~2018)의 번역본(한길사, 2005)이 정본으로 통용돼 왔다. 하지만 이 판본에 대해 헤겔 연구자들 사이에 여러 이의가 제기됐고 새로운 번역본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꾸준히 나왔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이번에 또 다른 헤겔 전문가 김준수 부산대 철학과 교수가 <정신현상학>의 새로운 번역본으로 임석진 판본에 야심 찬 도전장을 내밀었다. “원본에 충실하고 학문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완역을 최우선 목표이자 원칙으로 삼은” 번역본이다. 이로써 <정신현상학>의 한국어판은 임석진본과 김준수본이 경합하는 체제로 들어섰다.

<정신현상학>은 서양 철학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난해한 저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따라서 번역자가 어떤 자세로 이 저작에 다가가느냐, 어떤 방식으로 내용을 이해하느냐에 따라 번역 문장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새 번역본의 옮긴이는 ‘해제’를 통해 자신의 번역 원칙을 밝혀놓았다. 우선 임석진본이 가독성을 앞세워 원문을 과감히 풀어서 옮긴 데 맞서 원문에 충실한 직역을 번역 원칙으로 세웠다고 강조한다. “원문의 구문론적 복잡성과 의미론적 모호성, 심지어 문법적 오류까지도 윤색하기보다는 가급적 번역문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문장을 구성했다.” 또 기존 번역본이 헤겔 사후 1832년에 나온 제2판을 기준으로 삼은 것과 달리, 새 번역본은 1807년 헤겔이 직접 펴낸 초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헤겔은 초판이 절판된 뒤 1831년 가을 제2판을 준비하면서 수정할 대목을 손으로 써나갔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수정 작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기존 판본은 이 수정 사항을 본문에 넣었으나, 새 번역본은 헤겔의 수기를 각주로 실었다.

<정신현상학>이 난해해진 것은 헤겔 사유 자체의 독특함과 심오함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집필과 출간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도 내용이 어려워지는 데 한몫을 했다. 당시 예나 대학 강사였던 헤겔은 정규 교수라는 안정된 자리를 얻고자 했으나, 그러려면 학문적 탁월성을 보여줄 저서를 서둘러 출간할 필요가 있었다. 헤겔은 출판사와 기한을 정해놓고 <정신현상학> 집필에 들어갔지만 마감은 끝없이 늦춰졌다. 더구나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등극한 뒤 프로이센과 전쟁을 치르던 때였다. 헤겔이 머물던 예나가 그 전쟁의 격전장이었다. 시간에 쫓긴 헤겔은 1806년 봄 <정신현상학> 절반에 해당하는 원고를 먼저 출판사에 넘겨 인쇄에 부치고 나머지 절반은 그해 10월에야 출판사에 보냈다. 그러고 난 뒤 ‘서문’을 새로 써 이듬해 1월 인쇄에 넘겼다. 이렇게 원고가 채 완성되지도 않은 채 인쇄에 들어간 탓에 그렇잖아도 난삽한 본문이 더 어지러워졌고, <정신현상학> 이해를 둘러싸고 여러 쟁점이 발생했다.

독일 관념철학의 거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런 사태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정신현상학>의 서두를 채운 두 종류의 머리글이다. 이 두 머리글 가운데 먼저 쓴 것이 ‘서론’이고, 나중에 쓴 것이 ‘서문’이다. <정신현상학>은 ‘서문’ 다음에 ‘서론’이 이어지고 그 뒤로 본문이 시작된다. ‘서문’과 ‘서론’을 따로 쓴 것은 집필 과정에서 헤겔의 생각이 크게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다. 본디 헤겔은 이 저작의 제목을 ‘의식의 경험의 학’이라고 잡고 ‘서론’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문을 써나가는 중에 내용이 급격히 늘어나 집필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던 ‘정신’ 장과 ‘종교’ 장까지 포함하게 됐다. 이렇게 분량이 커지고 내용이 확장되자 뒤늦게 책 제목을 ‘정신현상학’으로 바꾸고 마지막에 ‘서문’을 새로 써 책 전체의 의미를 부각했다.

그렇다면 애초의 제목 ‘의식의 경험의 학’과 나중에 바꾼 제목 ‘정신현상학’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의식의 경험의 학’에서 말하는 ‘의식’은 우리 인간의 의식을 가리킨다. 의식이 온갖 방식으로 자기와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마침내 절대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 헤겔이 초기에 생각한 집필 구도였다. 그러나 ‘정신현상학’의 ‘정신’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라 정신 자체 곧 신의 절대정신을 가리킨다. 이 정신이 인간의 의식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전개함으로써 절대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정신현상학’이다. 경험의 주체가 ‘인간 의식’에서 ‘정신 자체’로 바뀐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의식이 수많은 경험을 거쳐 절대적 앎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 첫번째 구도였다면, 정신 자체가 인간 의식을 통해서 자신을 펼치고 완성하는 과정을 그려 보여주는 것이 두번째 구도였다. 그렇게 보면 <정신현상학>은 헤겔이 처음 생각한 책(‘의식의 경험의 학’)보다 훨씬 더 장대하고 웅혼한 저작이 된 셈이다.

새 번역본은 임석진본과 비교해보면 거의 모든 문장에서 차이를 보인다. 가령 임석진본은 ‘서문’의 한 구절을 이렇게 옮긴다. “진리는 곧 전체다. 그러나 전체는 본질이 스스로 전개돼 완성된 것이다. 절대적인 것에 대해 얘기한다면, 이는 본질상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며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그의 참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야만 하겠다.”(55쪽) 반면에 새 번역본은 같은 곳을 이렇게 번역했다. “참된 것은 전체적인 것이다. 그런데 전체는 오로지 자신을 전개함으로써 스스로를 완성하는 본질이다. 절대적인 것에 관해서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결과이며 종착점에서야 비로소 참으로 그것인 바대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17쪽) 김준수본이 원문에 맞춘 번역이라면, 임석진본은 좀더 자유로운 번역이다.

이 인용문에서 얼핏 드러나는 대로, 헤겔에게 진리는 개별적이고 파편적인 앎이 아니라 지난한 도야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도달하는 전체에 대한 앎이다. 헤겔 사유의 담대함은 변증법적 방법을 통해 인간 삶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체를 시야에 넣는다는 데 있다. 동시에 이렇게 전체를 장악한 것만이 진리라는 이 근본 사상은 이후 헤겔 철학에 대한 무수한 도전과 비판을 낳았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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