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현의 '옛 신문 속 강원도 읽기'] 45. 1931~32년 이순신유적보존 성금낸 후손 찾습니다

박미현 입력 2022. 9. 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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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상인부터 학생까지 '충무공' 지켜낸 작은 영웅들
1931년 이순신 묘소 경매 위기 보도
전국 각지서 '유적보존운동' 기부행렬
남북강원도 490여건 각계각층 동참
채무 해결 후 묘소 개축·현충사 중건
문화재청, 성금 기탁자 후손 찾기 캠페인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부터 1920년 이전까지 10년 동안 일본제국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이순신 관련 기사는 몇 건이나 될까? 단 1건도 없다. 대한제국기에 발행된 한글신문에서는 몇 건이나 실렸을까?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에서 ‘이순신’을 검색어로 넣으면 1898년 3월 8일자 독립신문 논설부터 1910년 6월 25일자 대한매일신보 1면의 논설까지 모두 209건이 찾아진다. ‘이충무공’으로 검색하면 1910년 6월 29일자 황성신문에 ‘이충무공 실기 전집’을 25전을 판매한다는 기사가 마지막으로 확인된다. 이순신은 을지문덕, 양만춘, 강감찬 등과 함께 기울어가는 국운을 되살릴 역사인물상으로 자주 신문에 등장했으나, 식민지가 되면서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데 1930년대 들어 이순신을 선양하는 전국성금운동이 펼쳐진다. 1919년 3.1운동의 성과로 민간신문을 창간할 수 있게되면서 가능했는데, 추진 배경과 과정을 옛 기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30년 9월 20일 동아일보에 ‘이충무공 묘각이 퇴락, 제토(祭土)는 은행에 저당되고 춘추 향사도 그칠 지경’이라는 기사가 실린다. 충남 아산 묘소와 묘각이 모두 퇴폐하고 향사까지도 거의 폐지될 지경에 있다는 것. 아산 음봉삼거리에 있는 묘답은 70여 명 공동재산으로 돼있었다. 제사를 받드는 후손 이종옥은 생계가 극빈해 1925년 호서은행에 2000원에 저당 잡혔으나, 아직까지 돈을 갚지 못해 머지않아 잃어버릴 지경이라고 알리고 있다. 이씨의 가족은 이곳저곳 친척 집으로 흩어져있고 기제사는 거의 빼먹는 지경이고, 묘지기도 벌써 흩어져버렸다고 설명하고 있다.

8개월이 채 못돼 1931년 5월 13일자에는 더 악화된 사정이 보도됐다. ‘2000원 빚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 묘소 위토, 묘소가 있는 산판도 빚에 들어가, 채권자 동일은행에서 최후 통지’라는 긴 제목으로 기사화됐다. 이순신 묘소와 사당 비용은 묘답에서 마련해왔는데 13대 종손 이종옥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토지를 담보로 은행에서 빚을 낸 결과 원금 1300원에 이자까지 합쳐 2400원으로 불어났다고 밝혔다. 은행은 토지 공동소유자에게 갚을 것을 독촉했으나 모두 빈한해 갚을 도리없이 지내오다가 최후통첩으로 5월 말까지 갚지 않으면 경매 처분하겠다는 통보가 왔다고 전하고 있다. 묘소가 있는 산도 다른 채무가 있을 뿐 아니라 묘소, 사당, 종가 등은 이미 여러 해 동안 수리하지 못해 한없이 퇴락했다고 보도했다. 경매를 추진한 동일은행장 민대식은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이순신 유해가 묻힌 묘소와 위토가 경매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은 잠재돼있던 이순신인물상을 부각하는 계기가 됐다. 채무를 갚기 위해 각지에서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빚 문제 해결은 물론 묘소 개축, 현충사 중건 등 유적과 유물 전반을 보존하는 전국적 차원의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으로 나아갔다. 이 운동은 이듬해까지 이어져 전국적으로 400여 단체, 2만여 명이 참여해 1만6000여원을 모금한 사실이 1932년 5월 9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됐다.

강원지역에서는 춘천 93, 철원 76, 고성 23, 홍천 18, 김화 18, 평창 11, 원주 10, 화천 10, 횡성 5, 인제 2건으로 확인된다. 개인이 적게는 5전부터 많게는 3원까지 성금을 냈다. 남북강원도를 통틀어 490여 건으로 파악된다. 북강원도까지 포함하면 평강군이 123건으로 가장 많다. 강원도내 전지역이 동참하지 않은 것은 당시 일제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운동이 확대되면서 노동 및 농민투쟁, 반제국운동 등이 중요하게 취급된 시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다른 신문사 동조없이 동아일보 단독으로 진행된 탓도 있다.

강원도 사람들이 성금을 내기 시작한 것은 5월 23일로 나타난다. 5월 23일 평창군 행동리의 조선구, 인제군 내면 면방리의 강영선, 김화군 김화읍의 장준옥 엄대섭 김동섭 태우선 김병년 5명이 동시에 냈다. 평창의 조선구는 1934년 평창유치원이 경비 문제로 어려움을 겪자 현금 400원을 선뜻 내놓은 적이 있어 1934년 6월 2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돼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충북 출생으로 1910년대 초 평창으로 왔는데 근근이 생활하다가 각처로 다니며 상업에 종사해 돈을 모아 거액을 기부했다고 칭송했다.

5월 27일에는 북강원도 회양군 금강산 장안사에서 관광안내와 사진촬영, 상점을 운영하던 13명이 한꺼번에 참여했다. 5월 28일 철원읍의 김규록, 5월 29일은 북강원도 회양군 난곡 현리에 사는 이대응, 박완숙 등 23명이 한꺼번에 냈다. 고성군에서는 ‘행상인’으로 직업을 밝힌 황보재달, 박도근, 박인덕, 최영화, 김덕오, 류병생, 박성옥, 김병률 9명이 10전부터 최고 50전까지 성금을 냈다. 통천탄광의 배예선, 금성군의 금양소년회 최재두와 최재일 등 다양한 층에서 동참했다.

춘천에서는 5월 27일 김근배, 유재선, 윤영모, 조동철이 가장 먼저 냈다. 가족단위 참여로 보이는 춘천 황씨네 동참이 시선을 끈다. 황영숙, 황명숙이 20전씩 냈고 춘천초(춘천보통학교)학생 황규성, 황호성, 황문성, 황유성 4명은 10전씩 낸 명단이 실렸다. 남면 가정리에 사는 류제곤과 류제준은 각30전을 보탰다. 또 춘일약방, 서상마을의 우리농우회 및 강원인쇄합자회사 소속 업자들이 동참했다. 학생 중에서는 5월 26일 통천군 고저의 통명보통학교 5학년생이 단체로 1원50전을 낸 것이 가장 먼저이다. 5월 29일에는 같은 학교 4학년생 일동으로 1원을 보냈다. 6월 10일에는 홍천군 서면 모곡학교에서 3원을 성금으로 보냈다. 6월 14일엔 춘천초(춘천보통학교)에 다니는 4명이 냈으며, 다음날인 6월 15일 춘천 정명여학교 학생들이 가장 많은 5원9전의 성금을 보냈다. 6월 23일에는 홍천 정숙여학교 생도 일동으로 1원 63전이 모금됐다. 6월 25일 평강공립보통학교 일동으로 2원, 6월 26일 춘천고(춘천고등보통학교) 2원, 6월30일 철원공립보통학교 고등과의 최한호와 김승택으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는 통천군 구항리 영수학교 학생 일동으로 7월 26일 72전을 냈으며, 학생 성금을 독려한 것으로 추정되는 교사 진태선이 같은 날 성금 1원을 보탰다.

1931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에는 가장 활발하게 참여한 평강군 성금 명단이 실렸는데, 평강읍 부인사진관, 광성상점, 동일이발관 임수현, 평강의원 윤덕로, 배영유치원생 송춘화, 요리점에서 일하는 ‘예기’라고 밝힌 구화선, 류산옥이 50전씩 낸 것으로 나타난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성금을 낸 경우도 있다. 6월 10일 고성군 고성읍에서 행상하던 이들이 한꺼번에 기금을 냈는데 이 중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가 10전을 보냈다. 6월 4일엔 신북읍 율리 주민이 1원을 내면서, 6월 15일 춘천시내 주민이 1원30전을 내면서 각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6월 26일 춘천고 교사와 학생들이 2원을 낼 때 같은 날 춘천에서는 ‘모 학생 외 4인’이라는 명의로 5명이 1원22전을 성금으로 내놓았다. 7월 4일 평강군 경원선 검불랑역전 앞에 ‘숭덕학교’가 있는데, 숭덕학교 소속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독지가가 성금을 냈다. 8월 21일에는 원주 시내에 사는 2명이 1원을 냈는데 단지 곽씨, 박씨라고만 밝혔다.

이충무공 유적 보존운동으로 모인 성금으로 현충사를 중건하고 패검, 각대, 옥로, 일기류 등 유물을 보존할 수 있는 보관처를 마련해 1932년 6월 5일 전국 각지 3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한 준공식이 열렸다. 1932년 6월 3일자 매일신보는 당일 참가자를 위해 기차 운임을 특별 할인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재미동포사회에서 발행한 신한민보 1932년 6월 7일자에는 멀리 강원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3만여명이 참석했다고 실렸다.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소장 이성희)는 현충사 중건 90주년을 맞아 22년 12월까지 ‘1932년 이순신 유적 보존 성금 낸 후손 찾습니다’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교과서에 실리고, 100원 주화로 통용되는 이순신 초상화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장우성이 조선시대와 맞지 않은 복식과 용모로 표준영정을 그려 교체 여론이 높은 가운데 국민과 함께해온 역사성을 살리기 위한 취지이다. 현충사관리소 홈페이지에 ‘현충사 중건 민족성금 기탁자 후손 찾기’ 코너에서 2만1000여건의 명단을 확인하고 후손 신청을 할 수 있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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