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 현실에 띄우는 절박한 안부 'A가 X에게' [다시 본다, 고전]

입력 2022. 9. 30.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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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수상 작가 존 버거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이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A가 X에게ㆍ존 버거 지음ㆍ열화당 발행ㆍ231쪽ㆍ1만5,000원

뉴욕의 유명 문학잡지 ‘파리 리뷰’가 작가들에게 물었다. ‘무인도에 책 세 권을 가져갈 수 있다면 어떤 책들을 가져갈 것입니까?’ 당신이라면? 나는 시집 세 권을 고를 것이다. 그런데 이 연재 글의 앞선 필자였던 박연준 시인이라면 존 버거(1926~2017)의 책들을 고를 것 같다. 박 시인은 평생 동안 한 작가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존 버거를 택하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으니까. 박 시인처럼 그의 책을 펼치며 타는 듯한 열정과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한둘은 아닐 것이다.

버거는 영국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화가와 미술평론가로 활동했다. 그는 정치참여적 성향과 강한 발언으로 논쟁을 몰고 다닌 평론가였다. 1972년에는 BBC의 미술 비평 텔레비전 시리즈 ‘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작가와 진행자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가 하면, ‘G’라는 소설로 맨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신은 이 작가를 빚던 날 컨디션이 무척 좋으셨던 것 같다. 그에게 모든 걸 주셨다. 지성적 분석력과 감성적 표현력, 섬세한 관찰력과 담대한 행동력, 그리고 사랑과 고통에 대한 놀라운 감지력이 한 사람 안에 전부 담겨 있다. 버거는 소설 ‘A가 X에게’에서 이 재능들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1972년 부커상을 수상한 영국 소설가 존 버거. 노동자들의 거친 삶과 전후 자본주의의 구조적 탐욕, 세계의 불평등을 파헤치는 작품을 써 왔다. 열화당 제공

여기 두 연인, 아이다(A)와 사비에르(X)가 있다. 약제사인 아이다는 사비에르에게 계속 편지를 쓴다. 사비에르는 테러리스트 단체를 결성한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종신형을 받은 죄수는 죽어야 감옥 밖으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중종신형을 받은 죄수의 ‘시신’은 그의 나이만큼 감옥 안에 더 있어야 한다. 어떤 이는 그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만든 교활하고 끔찍한 형벌이다. 두 연인은 법적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어서 면회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영원히 만날 수 없고 편지만이 그 가망 없는 사랑을 이어주는 수단이다.

아이다는 아몬드를 먹으며 아몬드 성분의 하나인 시안화수소산이 “체포되었을 때 죽음보다 더 가혹한 운명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작은 약병”에 들어 있다는 점을 떠올렸다고 쓴다. 이런 문장으로 독자들은 두 연인이 얼마나 암담하고 쓸쓸한 세계의 구석에서 살아 가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아이다는 감옥에 갇힌 연인에게 비누 열두 개를 보내며 적어도 네 개는 받아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머지는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사랑은 늘 이런 식이다. 시대의 어둠, 운명적 불운, 제삼자의 모략, 서로에 대한 의심, 착각과 실수 등 배송과정에 끼어든 각종 장애로 내가 보낸 사랑의 정량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 당신의 연인이 홀로 어떤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는지 살피라는 듯 소설은 거듭되는 배송사고를 전한다.

아이다가 있는 감옥 밖이 감옥 안보다 형편이 나은 것은 아니다. 아이다는 얼마 전 이웃에 있는 한 순박한 이발사의 가게에 미사일이 떨어졌다고 쓴다. 그곳이 범죄자들의 은신처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짓이었다. ‘그들’ 역시 구체적으로 호명되지는 않는다. 자유의 박탈에 저항하는 모든 이를 테러리즘으로 매도하는 어떤 세력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집터에서 망연자실해하는 이웃을 보며 아이다는 쓴다. “모든 게 먼지가 되어 버렸고, 그 주변에는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어요. 파이프와 전선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었죠. 일생 동안 한데 모여 있던 모든 것들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이름을 잃어버린 거예요. 정신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것들의 기억상실증.” 그곳에서 이발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무엇일까? 그는 빗자루를 쥐고서 발아래가 아닌 먼 곳을 응시한 채 공허하게 비질을 하며 말한다. “손님 이발을 마칠 때마다 매번 바닥을 쓸었어요. 이발사가 지켜야 할 직업상의 제일원칙 중 하나니까.”

이발사의 회복탄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다. 그의 모습은 사회적 참사와 타자의 폭력으로 삶이 완전히 부서진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을 닮아 있다. 이들은 먹을 사람 없는 밥상을 차리고 신을 사람 없는 구두를 강박적으로 닦는다. 세계가 통째로 파괴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은 이 속절없는 반복으로 어떻게든 삶을 복구하려는 몸짓을 멈추지 못한다. 부러진 날개로 바닥 위에서 한없이 파닥거리는 새처럼.

사랑 이야기가 어쩌면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둘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광범위하게! 이런 이야기를 단 한 번만이라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진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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