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한글에서 정음으로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2022. 9. 3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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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좁다. 한류가 넘친다. BTS, 블랙핑크,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 게임>, 임윤찬, 프리즈 아트페어… 음악, 영화, 드라마, 미술에 이르기까지 월드베스트는 이제 헤아릴 수조차 없다. 단군 이래 이런 일이 없었다고 모두들 환호 일색이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하지만 이게 전부도 아니고,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다. 그다음 층위와 단계를 생각하면 걱정도 된다. 정작 한류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 꽃은 어디에 뿌리박고 있는가 하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통찰이 아직 없다. 잘해야 서구 대중음악과 동시대 사람들의 사회적인 여건, 즉 식민지, 전쟁과 분단,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극복하고 이룩해낸 데에서 찾아낸다. 모든 한류를 최종적으로 관객 시장 재미로 환원시켜 평가하는 마당에 지난한 시간을 기다려야 대답이 돌아오는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골치 아픈 일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류, 즉 K컬처의 성공요인을 예술가 개인의 노력 내지는 인간승리, 당대 사회의 풍자나 비판에서 구해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평면적이고 단선적인 접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한류의 결정체를 휴머니즘, 인본주의 내지는 인도주의로 본다. 이것은 종적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세계에 열려 있는 한국의 역사전통의 심연을 시추하면 바로 증명된다. 월드클래스의 K컬처가 오늘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만 해도 훈민정음, 퇴계학과 다산학, 추사체와 민화 같은 성취 지점에서 확인된다. 20세기 근 100년간 문명개화를 위해 서구 배우기에만 몰입했기 때문에 전통문화의 그 역사적 층위와 격조가 얼마나 깊고 높은지에 대해서는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한류의 원천인 우리 역사전통을 감추고 부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되는 때로만 되돌아가보아도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다. 한글을 사랑하면서도 그 터전인 조선의 생각을 부정하는 것은 자가당착임을 바로 안다. 한류나 K컬처라는 말이 또 다른 배타성을 잉태하는 프레임 같아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다. 세종은 말과 글이 달라 불통하는 조선 백성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자 우주적 시각에서 인류 차원의 언어를 만들어냈다. 정음은 우리말에 짝하는 문자로서 한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570여년 전에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오늘날 문자문명의 패러다임 자체를 뒤바꾼 키보드·자판을 염두에 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첫마디는 ‘천지가 움직이는 원리는 오로지 하나의 음양오행일 뿐이다(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로 시작된다. 오늘날 우리가 점치는 도구로 타락시켜버린 주역이다. 하지만 태극이 무극이고, 시공이 탄생하는 빅뱅이 바로 이 지점임을 지금 138억년 근방으로 날아간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이 보여주고 있다. 모음 · ㅡ ㅣ는 하늘이 둥글고 땅이 평평하고 사람이 서 있는 형태를 추상화한 것이고, 자음 ㄱ ㄴ ㅁ ㅅ ㅇ은 발음기관을 본뜬 것이다. 천·지·인 삼재(三才)와 오방·오색·오음 등 오행사상이 토대다. 정음은 주역이 과학임을 입증시키고 있다.

따지고 보면 동서고금을 다 둘러봐도 한글의 자모보다 더한 상형문자는 물론 미니멀이나 추상예술도 없다. 더욱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우리말을 분해할 대로 분해하여 ‘초성+중성+종성’의 음소 단위까지 나누어 문자라는 건축적인 구조로 보여주고 있다. ‘감’이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ㄱ + ㅏ + ㅁ’으로 분해하고 조립하기를 자유자재로 하면서 시각화해낸 것이다. 한글이 정자(正字)가 아니라 정음(正音)인 이유다. 이것은 현대물리학에서 모든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를 전자와 원자핵으로 나눈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서구 언어학자들이 소리를 음소 단위까지 나눌 수 있음을 발견한 것도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한다면 이제부터는 이미 우리 역사전통 속에 성취되어 있는 세계, 인류, 우주에 열려 있는 우리 잣대를 우리 스스로 먼저 찾아내야 할 때가 왔다. 마냥 한류에만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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