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매생이탕

2022. 9. 30. 00: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매달 열리는 그룹사 사장단 회의가 끝나고 오찬 메뉴로 매생이탕이 나왔다. '때가 이른데도 먹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한술 한술 뜰 때마다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매생이는 귀한 음식이었다. 제철인 11월과 이듬해 2월까지인 겨울에만 구할 수 있었다. 날이 아주 추워야 시장에서 볼 수 있었고 적은 수확량으로 가격도 꽤나 비쌌다. 고향인 바닷가 동네 여수에서조차 매생이는 쉽게 살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었다. 문제는 파는 사람이 있더라도 파래와 너무나 비슷해서 속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쩌다 어머니가 매생이를 사 왔다고 하면 아버지가 한껏 기대하시다가 한 숟갈 뜨면서 "아 이건 매생이가 아니고 파래야"라고 하시며 시무룩해지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그러다 진짜 매생이로 국을 끓이고 아버지가 맛있게 드시던 날이면 어머니는 마치 큰 업적을 이룬 것처럼 흐뭇해했다. 온 가족의 분위기도 덩달아 훈훈해졌다.

아무 때나 매생이탕을 먹을 수 있고 속을 염려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보다 행복해진 것 같지는 않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부족한 것이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행복의 총량이 늘거나 행복지수가 나아지지 않은 것이다.

2022년 3월 발표된 유엔(UN)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조사 대상 146개국 가운데 46위였다. 우리 위상에 걸맞지 않은 순위를 받아든 것은 GDP나 기대수명에서는 최상위권이었지만 사회적 지지, 관용 등에서 바닥 수준의 저조함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하버드대학 성인발달연구소의 조사는 조금 더 피부에 와닿는다. 이들은 268명의 대상자를 선정해 대학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추적하여 행복의 비밀을 연구했다. 흥미로운 점은 부자이거나 권력이나 명예를 많이 가진 사람보다도 인간관계가 만족스러운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다. 생계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행복은 좋은 인간관계에서 온다는 뜻일 것이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살게 되었지만 행복해지지 못한 이유는 그에 걸맞은 건실한 인간관계를 만들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모했고 가족 구성원도 두 자녀에서 한 자녀가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2050년에는 1, 2인 가구의 비율이 75.8%에 이를 정도로 혼자 사는 게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어울려 사는 데서 오는 행복감도 좋지만 어울려 살면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이나 불편함을 오히려 더 못 견디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요즘 같았으면 가짜 매생이탕이라고 시비하면 부부관계가 소원해졌을 것이다. 자녀가 줄어 부모가 정성을 훨씬 많이 들이지만 서로가 외로움을 더 크게 느끼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나는 잘 모른다.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만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도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된 것 같다.

[최광해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대표]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