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남녀노소 앞다퉈 귀 뚫었던 한반도 '귀걸이의 나라'는 어디?

유석재 기자 2022. 9. 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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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그런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1970년대 문방구에서 팔던 ‘문신 판박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딱지나 스티커 같은 그림을 팔에 대고 문지르면 문신처럼 달라붙는 것이었습니다. 몇 장 사다가 집에서 팔에 문지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께서 “네 이놈! 뭐 하는 짓이냐”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어린 제가 물로 씻으면 지워지는 문신이라고 아무리 항변을 해도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요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거늘 어찌 그런 짓을 하느냐!”고 야단치셔서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감히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란 이 말은 ‘효경’ 첫장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그 이후로 몸에 문신을 새기는 일 같은 것은 두번 다시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꿈에서라도 할아버지께 혼날 것 같아서요.

귀걸이를 걸기 위해 귀를 뚫는 숱한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집안 어르신께 그런 꾸중을 듣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님들은 장신구를 걸기 위해 신체를 훼손하는 따위의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요. 그것은 성리학 이념이 사회를 지배하던 조선시대의 조상들을 말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조상들은 그와는 다르게 살았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이와 관련된 가치판단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일까요.

국립공주박물관의 '귀엣-고리' 특별전. 왼쪽에 보이는 것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 왕비의 귀걸이. /국립공주박물관

며칠 전 개막한 국립공주박물관의 특별전 ‘백제 귀엣-고리: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의 기자간담회에 갔다 왔습니다. ‘귀엣고리’는 ‘귀고리’ ‘귀걸이’의 옛말입니다. 제가 언론사 입사시험을 볼 때만 해도 ‘귓불에 다는 장식품’은 ‘귀고리’였고, ‘귀걸이’는 ‘귀가 시리지 않도록 귀를 덮는 물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표준국어대사전 ‘귀걸이’ 항목에 ‘귓불에 다는 장식품’이란 뜻이 추가됐습니다. 귀에 거는 장신구를 ‘귀고리’라고 해도 맞고 ‘귀걸이’라고 해도 맞는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특별전이 ‘백제의 귀걸이 216점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서 전시되는 역대 최대 규모의 고대 귀걸이전(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천수백년 전의 백제 귀걸이가 현대까지 200점 넘게 남아 있다는 얘기가 되지 않습니까?

국립공주박물관의 '귀엣-고리' 특별전. 오른쪽에서 하얀 마스크를 쓰고 뭔가를 설명하는 사람이 한수 국립공주박물관장. 앞에 보이는 것은 경주 보문동 합장분(부부총)에서 나온 신라 귀걸이다. /국립공주박물관

다음은 국립공주박물관의 한수 관장, 나선민 학예연구사와 이와 관련해 나눈 대화입니다.

―백제 귀걸이 수량이 생각보다 무척 많습니다. 출토된 지역은 어딥니까?

“북쪽에서부터 강원도 화천 원천리, 원주 법천리, 서울 석촌동에서 충남 천안 용원리, 서산 부장, 공주 수촌리와 무령왕릉, 부여 왕흥사지…”

―최남단은 어딘가요?

“전남 나주 복암리입니다.”

'백제 귀엣-고리'전의 백제 귀걸이 분포도 패널.

―화천에서 나주까지, 한반도에 있던 백제 영역 거의 전역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겠군요. 그런데 이건 지금까지 보통 무덤에 넣는 의례용 부장품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화천 원천리 유적에서는 불에 탄 집터에서 귀걸이가 발견됐습니다. 사람들이 화재가 난 집에서 대피하면서 미처 챙겨나오지 못한 귀걸이였던 겁니다. 무덤에서 나온 귀걸이와 비슷한 형태였습니다. 평소 일상 생활에서 귀에 걸던 귀걸이를 무덤에 넣었다는 얘기가 되죠.”

―실제로 귀걸이를 걸고 다녔다는 것이 되는군요. 그러면 귀를 뚫어야 했을텐데, 언제 뚫었을까요?

“무덤에서 나온 귀걸이들 중에는 성인이 된 뒤 걸었던 귀걸이뿐 아니라 어렸을 때 착용한 작은 귀걸이들도 함께 있는 경우가 있어요. 어렸을 때 이미 귀를 뚫었다는 것이 되죠.”

―무령왕릉에서도 왕의 귀걸이가 발견됐잖아요. 그럼 남자들도 귀걸이를 걸고 다녔다는 겁니까?

“남북조시대 양(梁)나라에 온 외국 사신들을 그린 ‘양직공도’를 당나라 때 모사한 ‘당염립본왕회도’를 보면, 수염 난 백제 사신이 분명 귀걸이를 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남자들도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귀걸이를 걸고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남북조시대 양(梁)나라에 온 외국 사신들을 그린 ‘양직공도’를 당나라 때 모사한 ‘당염립본왕회도’의 백제 사신. 귀걸이를 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외국으로 파견 나가는 사신이 귀걸이를 찬 채로 공식 석상에 갈 정도였다면, 백제 남자들이 평소에 귀걸이를 하는 것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겠군요. 그렇다면 귀족들만 평소에 귀걸이를 했던 걸까요?

“최소한 귀족과 도성에 사는 평민들은 모두 귀걸이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귀족은 금 귀걸이, 평민은 그보다 좀 저렴한 금동 귀걸이를 착용한 것으로 봐야겠죠.”

―왜 그렇게 백제 사람들은 귀걸이를 좋아했을까요?

“패션 감각이 다른 나라와 달랐던 것 같아요. 고구려나 신라에서도 귀걸이가 있었지만 대략 서기 5세기까지였고 그 이후로는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백제는 6~7세기까지도 귀걸이를 착용하는 풍습이 계속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리하자면 남녀노소,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화천에서 나주까지 모두들 귀를 뚫었다는 것이 되겠군요. 그렇다면 백제야말로 고대 한반도 ‘귀걸이의 나라’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논어’를 적은 백제 목간이 출토되기도 했지만, 이때만 해도 공자님(또는 효경의 저자로 여겨지는 공자의 제자 증자) 말씀은 그저 ‘좋은 말씀’ 정도로 여겼을 뿐, 목숨을 걸고 따라야 할 이념까지는 아니었던 겁니다.

국보로 지정된 무령왕의 금귀걸이. /국립공주박물관

지금은 지름 1㎜ 정도로 귀를 뚫지만 백제 때는 3㎜나 되는 큰 구멍을 뚫어야 했습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왕의 귀걸이는 길이 10㎝가 넘고 무게는 54.7g이 넘는 대형이지만, 귀족과 평민의 귀걸이는 길이 2~5㎝ 정도의 작고 정교한 장신구였습니다.

특별전 제목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란 것은 공주에 사는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에서 따온 것입니다. 일견 작고 단순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볼수록 미감(美感)이 돋보이는 백제 귀걸이의 특징을 나 시인의 시구를 빌려 표현한 것이죠. 둥근 고리에 금실이나 사슬로 연결고리를 걸고 중간장식과 끝장식을 매단 백제 귀걸이는 입체 장식과 평면 장식을 조합해 다채로운 디자인을 구현했습니다. 뛰어난 금 세공술에 힘입어 고리에 화려한 드리개(수식·垂飾)를 달아 아름다움을 더하기도 했죠.

국립공주박물관 '백제 귀엣-고리'전에서 백제 귀걸이의 미학을 설명한 패널.

남녀노소 누구나 금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귀걸이를 귀에 걸고 화사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했을, 그 어느 시대의 어느 나라보다도 뛰어난 미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을 백제 사람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 사람들이 들어간 건물 안에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림을 새긴 산수문전이 타일처럼 바닥에 깔려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금동대향로로 향을 피웠을 것입니다. 서울에서 이 글을 쓰다 보니, 백제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됐습니다. 백제인들은 한성백제 시기부터 귀걸이를 걸고 다녔다는데, 한성백제의 ‘한성’은 서울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으니까요. 사실 백제 전체 역사의 3분의 2 이상이 그곳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것입니다.

백제 보물: 금동대향로, 산수문전

그런데 아직 고등학생인 제 딸도 몇 년 안에 귀를 뚫으려고 할 것 같은데, 아버지인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할아버지처럼 ‘효경’의 첫장을 인용하면 안 되는 걸까요? 왠지 굳이 백제 사람들 얘기를 딸아이에게 해 주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죠.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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