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이 툭 끊어졌을 때

한겨레 2022. 9. 29.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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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게티이미지뱅크

[삶의 창] 이광이 | 잡글 쓰는 작가

살다보면 업이 끊어지는 때가 있다. 한 생을 한 업으로 지탱하면 좋으련만, 공무원이 아닌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밥줄이 툭 끊어지곤 한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가는 것이라고 자위는 해도 업의 단절이 반가운 일일 수는 없다. 그것이 타의면 해고인데 그때는 지노위, 중노위 거쳐 한판 붙어보는 것이 좋다. 의원면직의 이름으로 사표를 쓰거나, 명예와 상관없는 명예퇴직, 자의 반 타의 반의 계약 만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병을 얻는 경우, 정년에 이르렀거나 회사가 망했을 때까지, 실직은 여러 양태로 찾아온다. 한 석달은 쉬어서 좋다. 넉달 접어들면 막막하고, 슬슬 몸이 쑤셔온다. 어디 갈래야 갈 데도 없고 오란 데도 없다. 밤 없는 백야처럼 무한정 쏟아지는 하얀 시간들, 필경 사주의 어느 ‘삼재(三災) 고개’를 넘고 있는 것이리라.

도서관에 간다. 나무가 보이는 창가 자리를 잡아 노트북을 켜두고, 마당에 나가 니코틴과 카페인을 보충한 뒤 자리로 돌아온다. 책을 펴들어도 잘 읽히지 않는다. 이럴 때는 10권짜리 대하소설이 좋다. 차차 뒤져 보기로 하고, 매번 상권만 읽다 만 <논어> 하권을 꺼내 읽는다. 공자가 높은 벼슬을 하여 고향에 갔다가 옛 친구(원양)를 만나는 대목. 그가 삐딱하게 앉아 공자를 맞이하니, 자 왈 “어려서는 공손하지도 않고 커서는 세상이 기록해줄 만한 일 하나도 못 하더니 늙어서는 죽지도 않는구나, 이 도적 같은 놈아!” 하고 작대기로 친구의 정강이를 툭툭 친다(‘헌문’편). 백발의 옛 친구에게 너는 죽지도 않는구나,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공자의 매력은 저런 데 있다.

책을 읽으면, 이제 그것을 어디 풀어먹을 데도 없는데 까닭 없이 뿌듯하다. 점심때가 돼 구내식당에 앉아 혼자 먹는 밥에서는 신맛이 난다. 그런 것은 외로움이나 좀 가라앉은 감정 같은 것을 가져오는데, 차차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꼭 나쁜 것이 아니라 가만히 지난날을 돌아보게 하는, 때로는 약이 된다는 사실도 느끼게 된다. 비가 갠 이튿날 아침, 도서관 뜰을 거닐면서 나뭇잎에 남은 빗방울 하나가 이마 위로 떨어져 내릴 때, ‘오, 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았네!’ 하고 곧 시가 될 것 같은 문장이 새어나오는 기쁨도 있다.

오후 4시가 되면 조바심이 들고, 슬슬 막걸리 생각이 난다. 한잔할 누가 없을까 하고 사람들을 떠올려보게 된다. 다들 바쁠 것인데, 좀 낫낫한 누가 없을까, 그런 생각 속에서 여럿이 지나간다. 두셋을 점찍고는, ‘별일 없으시오?’ 하고 끝에 물음표를 달아 문자를 보내본다. 그것이 나로서는 상당히 용기를 내는 일이고, 사실은 구조 요청이다. 갑자기 묻는 것이라 선약이 있는 때가 많은데, 그런 경우는 낙심하고,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이때 경우의 수는 선약이 있는 경우, 없는 경우, 이렇게 둘이지만, 또 하나가 있다. 나는 허탕 치고, 노량진수산시장에 들렀다 귀가하는 낚시꾼처럼 마트에 들러 독작하는 때도 있지만, 그래도 당첨률이 좋은 편이다. 회사에 다니는 ㅂ형으로부터 ‘끝나고 봅시다’ 이렇게 답장이 온다. 그는 늘 선약이 없다. 일이 성사된 그 시간부터 술집에 가기까지 2시간 남짓은 주점에 있는 시간보다 행복하다. 선약이 두번 없을 수는 있다. 하지만 세번째 없다는 것은, 경우의 수의 세번째, 선약을 취소한 다소 희귀한 경우다. 내가 어디에 앉아 문자를 보냈는지를, 나의 타전이 목마름이며, 비장의 카드라는 것을 그가 알고, 나를 낙담시키지 않으려고 차마 어쩌지 못한 그가 선약을 미루고 있음을 내가 안다. 선술집에서 둘이 막걸리를 한잔하는 것은 가는 마음과 오는 마음 두개의 큰마음이 만나야 가능한, 엄청난 일이다.

삶이 그 자체로 고독한 것은 어쩔 수가 없고, 단지 일할 나이에 도서관에 다닌다고 해서 스스로 오그라들어 강호에서 고립돼서는 안 된다. 창을 열고 내다보고 있으면 창 너머에서도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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