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칼럼] 대재앙 앞에서

한겨레 2022. 9. 29.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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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칼럼]대재앙을 피하기에는 이미 때를 놓쳤을 것이다. 이런 비관적 전망이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그래서 수백년 동안 인간의 욕망체계와 가치관을 지배하면서 절제 없이 자연을 유린해온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고, 자연을 존중하듯 다른 인간, 다른 동물을 존중하는 생태공동체 사회를 이룩할 수 있기를.

홍세화 |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지난 9월24일 오후, 서울 숭례문·시청·광화문 일대에서 3만5천여 시민이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 “이윤보다 사람!”을 외치며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했다. 상서로운 기운이었을까 신기루였을까, 하늘에 피어 있던 무지개 구름이 꽤 오랫동안 행진 참가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는 부국이 짓고 벌은 빈국이 받고’. <한겨레21>이 꾸린 특집호에 담긴 제목의 기사는 “온실가스 0.4% 배출한 파키스탄이 기후위기 취약국, 사상 최고의 비 쏟아진 몬순 영향으로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겨”라고 전했다. 그들의 식민모국이었던 영국보다 더 넓은 지역이 수몰됐고, “어린이 340만명을 포함해 640만명의 주민이 이재민이 됐고, 국민 7명 중 1명인 3300만명이 홍수 피해를 봤”으며 어린이 551명 등 1559명이 숨졌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의 숫자에 서사가 담길 여지는 없었다.

<경향신문> 사설이 인용한 국제구호기구 옥스팜 발표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15년까지 전세계 소득 상위 10%가 온실가스의 절반 이상을 배출한 반면, 소득 하위 50%는 단지 7%의 온실가스를 배출했다고 한다. 이 부조리한 현실에는 전사(前史)가 있다. 소득 상위 국가들은 거의 모두 식민모국이었고, 소득 하위 국가들은 대부분 식민지였다. 노예무역과 식민지화에 따른 죽음과 고통은 조상의 일로 끝나지 않았다. 자원 수탈과 식민모국의 획일적 농지 이용 등으로 자손들에겐 자력으로 순환 발전시킬 경제적 토대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식민모국들이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국경선과 토착 지배세력을 통한 신식민지 정책으로 인민들은 내전과 폭정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살길을 찾아 식민모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해보지만 지중해를 건너는 데 성공해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반이민, 제노포비아 구호와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다. 그런 그들에게 급기야 기후재앙까지 덮쳤다. 대대로 풍요를 누린 식민모국이 배출한 온실가스의 영향으로.

책임? 2009년 코펜하겐 기후협약에서 북반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책임지기로 합의하고, 기후위기 최전선에서 고통받고 있는 개발도상국과 저소득 국가들이 인프라를 구축하고 위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1천억달러를 조성해 2020년부터 주기로 약속했다. 2020년 12월 유엔 사무총장이 “당신들이 주기로 약속했잖아?”라고 통사정을 했다는데, 그는 정말 그 나라들이 십여년 전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었을까? 그 나라들은 최근 반이민, 반이슬람 기치를 높이 든 극렬 파시스트를 총리로 선출한 이탈리아를 비롯해 극우화 경쟁을 벌이는 유럽 국가들이 모두 그렇듯이, 선거로 정권이 교체되는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차기 유엔기후회의(COP27)가 이집트의 휴양지에서 열린다. 2013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수많은 민주인사를 고문, 투옥, 처형한 군사독재 정권에 알리바이 기회를 제공한 것도 그들 민주국가다.

힘의 논리가 관철되는 국제정치에 비해 그나마 민주적 통제가 작동하는 각국의 국내정치 상황을 보더라도 불평등은 심화하고 있다. 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외친 “이윤보다 사람!”의 구체적 국내 현안인 노란봉투법은 ‘하청-특수고용노동자를 근로자로 인정하고 원청을 교섭 대상에 포함해(여태 그렇지 않았다!)’ 합법 파업의 범위를 아주 조금 넓히자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국회 통과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내 불평등도 민주정치로 극복할 수 없는 터에 국경 없는 기후위기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오늘의 세계시민이 막을 수 있을까. 기후재앙은 이미 남반구 제3세계를 덮쳤고 그 파고에 최근 가속도가 붙은 게 분명한데!

인간이 여전히 전쟁을 벌이는 것에도 어느새 익숙해진 우리다. 최근 핵무기 사용까지 거론되는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침략, 마침내 제국주의 세력 간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위험 앞에서도 별일 없이 잘 살고 있다. 과학과 학문의 엄청난 발전, 경제적 도약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한 인식은 칸트가 <영구평화론>을 썼던 18세기 말보다도 지금이 더 퇴영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은 어떤가. 오늘날 동물권 표어의 하나인 “문제는 그들이 생각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다. 그들이 말할 수 있는가 아닌가도 아니다. 그들이 고통을 느끼는가 아닌가이다”라는 글을 제러미 벤담이 썼던 때가 18세기 말이었다.

이런 인식의 빈곤, 공감능력의 상실 말고도 오만한 기술주의자들이 우리를 흔든다. 대재앙의 인자는 기후위기만큼 우리 안에 있다. 모든 사회 상부구조의 물적 토대가 자본주의에 있다고 할 때, 지배세력이 자신의 발등을 찍는 일에 나설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들이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기술주의자들에게 이끌리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에겐 오직 세계시민의 분노와 항거, 그들과의 연대, 아스팔트 거리투쟁을 통한 정치권에 대한 압박만 남아 있다.

대재앙을 피하기에는 이미 때를 놓쳤을 것이다. 이런 비관적 전망이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그래서 수백년 동안 인간의 욕망체계와 가치관을 지배하면서 절제 없이 자연을 유린해온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고, 자연을 존중하듯 다른 인간, 다른 동물을 존중하는 생태공동체 사회를 이룩할 수 있기를. 인간사는 말한다. 노예(농민, 노동자)의 자발적 반란은 거의 실패했고 설령 성공해도 주인만 바뀔 뿐 노예의 처지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유 아니면 죽음을!”은 인간이 아닌 자연의 구호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굴종하지만, 자연은 굴종하지 않고 그냥 파괴된다. 그리하여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자연의 복원 속도보다 인간에 의해 파괴되는 속도가 빠른― 앞에서 가진 자들은 스스로 자연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투항하는 대신 끝까지 버티려고 할 것이다. 지하 수백m 벙커 속에서 두더지처럼 살더라도. 지금 우리는 그런 디스토피아와 생태공동체 사회 사이의 갈림길에 서 있다.

부기: 탈석탄법 제정 국민동의청원이 이 글이 실리는 오늘(9월30일) 마감된다. 국회의원들에게 법안 논의를 하도록 의무를 지우려면 5만명이 참여해야 하는데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참여하기를, 또 주위 분들에게 권하기를. 우리가 중고생 시절에 읽었던 스피노자의 “설령 지구가 내일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 한그루를 심겠다”는 그런 심정으로. https://bit.ly/탈석탄법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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