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를 고르고 이름을 붙이는 일

한겨레 2022. 9. 2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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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열린편집위원회]구조적 성차별은 남성중심적 조직문화를 용인했다. 이런 공동체에서 여성은 동료가 아니라 성적 대상이 되고, 그래도 되는 폭력의 객체가 됐다. 사건은 공동체에 누적된 문화의 결과값이다.
스토킹 살해사건이 벌어진 서울 신당역에서 지난 18일 오전 화장실 들머리에 마련된 추모의 공간이 추모의 메시지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사진은 여성화장실 표시와 메시지를 다중노출기법으로 찍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열린편집위원의 눈] 이소희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

영화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 서래(탕웨이)는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는 해준(박해일)의 말을 듣고 ‘붕괴’란 단어를 검색한다.

해준의 말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서래의 마음을 알 듯했다. 글씨를 배우지 않고 초등학교에 입학했었다. 받아쓰기 시간 내겐 단어 뜻보다 맞춤법에 맞게 받아 적었는지가 더 중요했다. 맞춤법에 익숙해지니 문장 속 단어가 궁금해졌다. 자주 국어사전을 펼쳤고, 단어가 품고 있는 뜻을 정확하게 알면 알수록 세상은 깊고 선명해졌다. 언론은 말, 도표, 사진, 영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의 사실들을 전달한다. 하지만 전달의 마지막엔 항상 글이 있다. 신문기사를 보면서 생각했다. 언론은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며 단어를 고를까?

9월14일 서울지하철 신당역 화장실에서 순찰 중이던 역무원이 동료에게 살해됐다. 가해자는 입사동기였다. 피해자는 오랜 시간 스토킹을 겪었다. 경찰 고소, 신변보호 요청, 화장실 비상벨 작동…. 피해자는 끝까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하지만 직장·경찰·검찰·법원의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일상이 안전하지 않다는 감각은 많은 이들을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있었던 6년 전으로 되돌려놓았다.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분노하고 슬퍼했다. 사건 이후 기사가 쏟아졌다.

기사 무더기 속에서 15일 <한겨레>는 입장을 발표했다.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화장실에서 여성 역무원을 살해한 전아무개씨 범죄를 보도하며 ‘스토킹 범죄’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습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과 경찰 범죄통계 등에서는 비슷한 범죄를 ‘보복범죄’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보복의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당한 만큼 그대로 갚아준다’는 것이어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한편 강력범죄 전조가 되는 스토킹 행위의 심각성을 가린다는 지적이 있어 왔습니다. 앞으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와 유사한 사건은 ‘스토킹 범죄’로 표기합니다.” <한겨레>는 스토킹의 정확한 사회적 이해를 위해 고심해서 단어를 골랐다. 단어를 고심해서 고른 과정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스토킹 뒤에 붙은 ‘범죄’라는 단어가 신경 쓰였다. 언젠가부터 권력형 성범죄, 그루밍 성범죄, 디지털 성범죄처럼 성폭력 대신 성‘범죄’가 따라붙는 경우를 자주 본다. ‘범죄’는 법에 근거해 처벌받는 행위이기 때문에 확실하고 힘이 센 표현이다. 고백하면 나 역시 성범죄라는 말을 종종 사용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사용하면 놓치는 것이 있다. “그 행위가 형법 제32장 강간과 추행의 죄에 해당하는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저촉되는 행위인가? 그래서 위법한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갇힌다. 법이 규정한 행위만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가해자 처벌만이 제대로 된 해결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법 개정만이 주요한 대안이 된다. 신당역 여성노동자 스토킹 살인사건을 스토킹 ‘범죄’로 명명함으로써 해결 방향은 ‘신고 때 경찰 대응코드 상향 발령, 가해자 구속수사 강화, 반의사불벌죄 폐지’ 등과 같은 제도와 법 문제로 귀결된다.

젠더 기반 폭력은 법에 기록된 범죄로만 규정할 수 없다. 서울교통공사는 구조적 성차별이 작동하는 공동체였다. 2020년 기준 서울교통공사 여성 직원 비율은 전체의 10.3%에 불과하다. 성별 임금격차 또한 35.71%로 서울시 유관기관 중 높은 편에 속한다. 2016년 서울메트로(현 서울교통공사)는 ‘(업무가) 여성이 하기 힘든 일’이라며 ‘여성용 숙소가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면접점수를 조작해 여성 지원자를 탈락시켰다. 구조적 성차별은 남성중심적 조직문화를 용인했다. 이런 공동체에서 여성은 동료가 아니라 성적 대상이 되고, 그래도 되는 폭력의 객체가 됐다. 사건은 공동체에 누적된 문화의 결과값이다. 스토킹 가해자의 법적 처벌만큼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을 점검하고 바꾸는 것이다. 일상의 성평등을 위해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몫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어떻게 명명하느냐에 따라 해결 방향이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수많은 사실을 글로 담고 전하는 일을 하는 언론이 단어를 고르고 이름 붙이는 일을 고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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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편집위원의 눈’은 8명의 열린편집위원들이 번갈아 쓰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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